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몽롱한 정신이 점차 맑아진다. 깔끔한 흰색의 천장, 포근하고 푹신한 무채색의 이불, 그리고 책으로 가득찬 책꽂이가 눈에 띄었다. 바닥에 깔린 러그는 볼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호는 작은 한 마디 만으로 제지했다.
"며칠 움직이기 힘들거야."
'이번엔 얌전히,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똑.똑. 천천히 떨어지는 링거 속 영양제의 방울들만 바라봤다. 이호는 어떠한 자선 행사에 나를 함께 데려가기 원했었다. 하지만 참석하지 못했고, 다리는 골절되었으며, 의사를 통해 심각한 영양실조라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안전거리가 깨진 지금, 몸이 낫는대로 이호가 날 한국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더이상 어린 시절, 조금 특이하긴 해도 좋아하는 것들을 찾던 나는 사라졌으니까. 그는 열심히 사는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지금 그를 가까이 마주하기 싫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내가 살아온 인생을 설명하는 것이. 적어도 그에게 텃밭의 식물 사진을 보낼 때에는 적당히 숨길 수 있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텃밭. 식물들과 함께 먼 타국으로 날아온 것을 잊었다. 잘 살아있을까. 저 멀리 짐가방이 보였다. 이호가 없는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가방을 열어보니 식물을 담은 케이스가 사라졌다. 결국 죽어버린걸까. 텃밭에 두고 올 걸. 괜히 내 욕심에 식물까지 죽인거야. 허망한 마음, 푹신한 러그,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숨을 참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몸이 움츠러든다. 다시 누우러 침대에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깔끔한 인상의 고용인이 문을 열었다.
"정원에 새로 심어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파헤친 짐가방 속 나의 초라한 물건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신속하고 능숙하게 짐을 다시 정리해주었을 뿐이다. 식물들이 잘 살아있다는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식물 때문에 흘리는 눈물만은 아니었다. 삶은 무겁고, 그것을 들어 버티고 또 버티다보면, 아주 사소한 계기로 모두 무너지는 법이니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소리와 함께 테오가 곁으로 다가왔다. 훨씬 커진 덩치, 부드러운 털로 내 주위를 맴돌고, 우는 나의 볼을 핥고,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위로해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테오를 붙들어 안고, 강아지의 품 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테오는 꼬리를 흔들었다. 나를 기억했다.
울면 기운이 빠진다. 러그는 참 부드럽다. 딱딱하고 차가운 장판 바닥과 달랐다. 저수지 물이 새어 나왔던 길바닥과도 달랐다. 하염없이 테오의 털을 쓰다듬으며 누웠다. 영양제 바늘이 빠져 바닥을 나뒹군다. 몽롱하다.
눈을 떠보니 같은 천장, 같은 침대였다. 팔에 밴드가 붙어 있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침대 곁에서 잠들어 있는 테오를 보고 현실임을 깨달았다. 내가 일어난 기척을 느낀건지, 테오는 선반 위에 놓여 있던 금색 종같이 생긴 버튼을 앞발로 눌렀다. 어제 보았던 고용인이 들어왔다. 난 정말 부스스한 머리에 막 자고 일어났는데. 기다렸다는 듯 음식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루를 넣은 크림 수프입니다."
그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음식을 놓고,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테이블 앞까지 옮겨주었다. 조용하지만 빠르게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나는 몸을 맡겨둔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테오는 내 속을 모르는게 분명하다. 그저 의자 주위를 맴돌며 꼬리만 신나게 흔들고 있으니.
"그리고.."
수프는 따듯하고 맛있었다. 고소하고, 부드럽고. 잠시 수저를 내려둔 채 혼자 남은 그를 바라보았다.
"완치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신 필요한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이 종을 누르시면 제가 오겠습니다."
어느정도 예상 했다. 이호의 표정이 그렇게 심각하고 좋지 않았던건 난생 처음 봤으니까. 그리고 그럴만 한 일을 내가 벌렸으니까. 어떠한 종류의 벌칙같았다. 아니, 벌칙이라기엔 지나치게 안락했다. 편안했다. 이 안락함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다 나은 후, 내가 진정 살아내야할 현실로 다시 돌아가기 수월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