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연은 순응했다.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어두운 구석에 누워 눈만 꿈뻑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적막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붕을 부수는 소리와 함께 헬기에서 밝은 조명이 내려왔다. 처음은 UFO라고 생각했다. 이곳이라면 UFO가 밤에 몇 대 쯤 다녀도 별 문제 되지 않을거 같았다.
*
폐가에 들어설 때, 그러니까 반나절 전 시간, 아직 해가 하늘에 떠 있던 낮에, 바닥과 가구는 먼지로 가득했다. 세연은 자신의 고향집을 떠올렸다. 먼지 가득했던 책장, 그 속에 있던 이호의 편지, 그리고 그의 책. 폐가에 남은 짐은 없었다. 당연해 보이지만, 세연은 그 빈 책장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가 되면 남겨지는 것. 때가 되면 남겨지는 사람. 혼자 시도하며 살아보아도 케케묵은 먼지만 가득 쌓인 인생.
세월의 흐름과 관리의 부재로 삐걱거리는 마루는 아주 연약했다. 너무 약한 나머지 세연의 무게도 지탱하지 못했다. 지하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충돌해 떨어진다. 너무 놀라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핸드폰은 없다. 타국에서 핸드폰을 개통할 돈도 없다. 소지품은 차에 두고 왔다. 운전 기사의 요구였다.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본래라면 나를 예정된 시각에 예정된 장소로 데려다 놓아야 하는 업무인데, 나의 호기심으로 지체되었으니. 지금은 지체 수준이 아닌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냥 이대로, 아무도 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콜록 거리며 웅얼거렸다. 수치심 따위의 감정은 아니다. 지쳤다. 모든 것에 대해.
*
머지 않아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세연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폐가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호가 말한 시간이 다다르자 초조했던 운전 기사는 결국 연락을 마쳤다. 세연의 기억에서도 이호는 시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아마 자신 때문에 화가 많이 났을거라 생각했다. 폐가는 사정없이 쓰러졌다. 마치 지하실로 추락해 나뒹굴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부터 구조하세요. 병원에 먼저 가겠습니다."
이호가 익숙한 목소리로 타국의 말을 한다. 세연은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고, 힘없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어딘가에 누웠다. 몰랐던 통증이 올라왔다.
*
니레아 로션 크림 광고가 전광판에 크게 걸려 있었다. 이호는 내가 단순히 눈만 감은 것을 눈치 챘다. 그의 모든 대처와 행위가 여유롭고 차분했다. 우리를 태운 리무진은 전광판 밑으로 난 도로를 조용히 지나갔다. 이호는 맞은 편에 앉아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만 감은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내 몰골이 어떨지 그제야 실감났다. 테오를 만나기는 커녕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이, 자신의 먼지가 차 시트에 묻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도망갈 수 없었다. 안전거리를 만들 수 없었다.
'세연에게
12살 생일을 축하해. 엄마가 이번에는 직접 생일 케잌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하셨어. 그래서 사탕을 넣지 않았는데, 만일 먹고 싶다면 얘기해. 식탁 병에 있던걸 먹어도 좋아.'
사탕이 먹고 싶었다. 희수가 만들어주었던 생크림 케이크도 먹고 싶었다.
"오렌지 사탕. 있어?"
"다리 많이 부었어. 골절인 것 같으니 움직이지마."
없을거라 생각하고 물은 질문이었다.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오랜만에 만난 이호에게 사탕을 달라는 얘기만 할 줄은 몰랐다. 이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 말썽을 제대로 부렸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래도 예전 시골에서의 이호는 좀 더 너그러웠다.
"입 벌려봐."
입 사이로 동그란 사탕이 들어왔다. 진짜 오렌지와 동떨어진, 달달한 오렌지 첨가물 맛이 입 속에 퍼져 나간다. 여전히 이호는 화난 것 같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그의 화난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
'우리 엄마를 희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마 너 뿐일거야. 난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희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무례를 저지르진 않겠지만.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를 이제 더는 묻지 않는구나. 대신 학교가 얼마나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곳인지에 대한 얘기가 늘었던 한 해였어. 너의 말에 동감하기 때문에, 그리고 학교를 들어가기 전 기대에 가득 찼던 네 어린 모습이 기억나기 때문에, 나는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이 될 수도 없어.
하지만 호두과자 장인 이야기를 하던 때처럼, 네가 정말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는 앞으로의 한 해가 되길 바라. 이제 1년 뒤면 중학교에 가게 되니, 이런저런 인생이나 진로에 관한 고민이 많아질테니까.
생일 편지에 재미없는 이야기만 적어버렸네.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는 평소에 많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