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르샤 Sep 17. 2023

K-워킹맘의 전래동화 다시 읽기

삐딱한 듯, 삐딱하지 않은, 따뜻한 전래동화 다시 읽기

뜬금없이 왠 K워킹맘이냐고? 혹여나 K-드라마, K-POP과 같은 K열풍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마음이 아닌가  수도 있다. 하지만 30~40대에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낳고 길러본 한국 여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고단함과 애환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외국에서도 여자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다.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 미셀 오바마 여사조차 눈물 흘리며 고백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부장적인 문화가 뿌리 깊은, 그래도 남자가 잘되야지 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우리나라만 할까.


물론 삶은 힘들 때도 좋을 때도 있다. 다만 또래 남자들과 평등하다고 믿고 교육받으며 자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워킹맘에게 삶은 출산과 함께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힘겨운 게임이 된다. 똑같이 해본 적이 없지만 여자이기에 육아와 가사의 메인이 되어야 하고, 회사에서는 똑같이 열심히 해도 노력만큼 인정받기 어려운 굴레.


거기에 보태어 든든한 와이프 찬스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남편까지 있다면 풀세트. 이 경우 나처럼 더욱 믿음직스러운 일당백 K-워킹맘이 된다. '부양'에 대한 책임감이 어깨에 한가득이다. 가끔 '어쩌다 내 인생이렇게 됐지?'라고 의문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그건 잠시 뿐. 일단은 지금은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일단은 토깽이 같은 아이들과 곰팅이 같지만 꼭 들러붙어 꿈쩍도 않는 남정네를 끌고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하니까.


어느 날 새벽 출근길. 문득 떠오른 전래 동화 이야기. 항상 글감이 이때 떠오르는 걸 보면 일은 글감의 원천이고, 결론은 일을 해야 한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이렇게 신선한 당위성으로 커버해 본다. 아, 이거 말고도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백가지는 말할 수 있다. 월급은 물론이고, 삼시세끼 밥도 나오고, 가끔 명절 선물도 보내주고, 밖에서는 대기업 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멋지다고도 해준다. 총알을 장전하듯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마음에 잔뜩 쌓아놓으면, 이따금 퇴사 충동이 몰려올 때 철통 같이 방어할 수 있다.


여하튼 어릴 때 읽었던, 혹은 20대 풋풋한 아가씨 시절까지만 해도 아름답거나 가슴 시린 이야기로 기억되던 전래동화. 팍팍한 삶에 고단해진, 이제 쓴맛 단맛도 어느 정도 본 K-워킹맘이라 순수함을 그대로 품기는 아쉽고 밋밋하다.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K-워킹맘의 발칙한 상상, 살짝 비틀고 꼬아본 전래동화 다시 읽기!




#1. <선녀와 나무꾼> 편

나무꾼이 옷을 감추는 바람에,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결혼을 하는 선녀. 아이를 낳고 알콩 달콩 살다가 날개 옷을 입고 다시 날아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야기에서 선녀는 나무꾼을 하늘나라로 데려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런데 선녀는 지상낙원인 하늘나라의 삶을 강제로 잃어버리고, 어느 날 갑자기 시골 아낙이 된 마음이 어땠을까? 마치 재벌집 딸이 납치를 당해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느낌은 아니었을까. 믿고 산 남편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날개옷을 감춘 '도둑놈'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어땠을까.


나무꾼은 자상했을까?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선녀의 날개옷을 감출 만큼 계산적이고 영악했으니, 그 뒤로 마누라를 들들 볶거나 혹은 놈팡이처럼 얹혀 산 건 아닐까. 선녀가 삯바느질로 먹여 살린 건 아닐까.


조르고 졸라 날개 옷을 다시 건네어받았을 때, '아, 그래도 귀여운 아이들이 있고, 뽁짝거리는 지금의 삶도 충분히 행복하잖아!'였을까 아니면 '저 망할 놈이 내 인생을 말아먹었구나. 저 인간만 아니었으면 하늘나라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을 텐데'였을까.


선녀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지붕에서 수탉이 될 만큼 선녀를 사랑했던 나무꾼의 사랑만은 진심이었으리라 믿는다. 참고로 그도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건 틀림없다! 사랑의 방식과 표현이 다를 뿐. 말하고 보니 왜 마음이 씁쓸하지.

 

#2. <백설공주> 편 

계모의 구박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잘생기고 멋진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한 그 이야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변태가 따로 없다. 원래도 죽고 못 사는 연인 사이였다면 모를까, 공주에게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정네 아닌가. 그런데 장례를 치르러 가는 중에, 뚱딴지 같이 관뚜껑(물론 검은색 관이 아니라 이쁜 유리지만)을 열고 망자에게 뽀뽀를 하다니!


양보해서 여기까지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동화의 결말은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지만, 왕자의 변태짓이 저 한 번으로 끝났을까? 결혼 이후에도 계속된 건 아닐까? 비슷한 예로 유명한 남자 배우가 떠오른다. 연예인인 그의 부인은 결혼 전 수많은 스캔들을 뛰어넘어 결혼을 했지만, 이후에도 흉흉한 소문을 견디며 꿋꿋이 지내고 있다. '전 행복해요'라면서. 백설공주도 밖으로 도는 자 때문에 속을 끓이면서도, 이웃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위해서, 혹은 백성들이 걱정할까 봐 웃으며 살았던 건 아닐까.


부디 왕자가 공주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순수남이었기를. 쓰다 보니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하다. 딴짓을 하려면 딴 주머니도 차고, 들키지 않으려면 용의주도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부지런함과 눈치가 그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대놓고 딴짓을 할 만큼 인간말종은 아닌지라. 어쩌다 보니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 모두 그에게 플러스가 되네.


#3.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편

울고 떼쓴다는 죄(?)로 갑자기 시골 바보에게 시집가게 된 평강 공주. 아버지한테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했겠지. 그래도 헌신적인 내조로 남편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만들고, 홀어머니 봉양까지 지극정성으로 한다. 온달은 결국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도 세운다.


이야기니까 그렇지, 가진 것도, 배운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뭐 하나 없는 남자를 저만큼 가르치고, 배우고, 익히게 하려면 얼마나 고단했을까. 울고 떼쓴다고 저렇게 내다 버리듯 딸을 방치하는 아버지는 또 뭔지. 온달이 미래를 위한 배움에 힘쓰는 동안 먹고사는 건 누가 해결했을지. 그녀도 선녀처럼 삯바느질을 했으려나.(그녀들이 삯바느질을 했다는 게 나에게는 이미 기정 사실화되어 버렸다.) 내다 버린 것도 모자라 바보와 결혼시킨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힘든 시간을 버텼을까?


혹은 그녀가 직접 할 수는 없었을까? 궁궐에서 어린 시절 빡센 조기교육을 훌륭하게 받았을 거고, 바보를 이렇게 만들 정도의 코칭 실력이면 직접 했으면 백배 잘했을지도..?


나도 평강공주 급의 멘탈과 능력을 갖췄으면 남편을 저렇게 훌륭하게 개조시킬 수 있었을까. 결론은 나의 모자람의 소치인 건가. 세 번째 이야기도 그에게 유리하게 끝이 나네. 에잇.




나의 '전래동화 다시 읽기' 콘셉트를 듣고, 친한 지인들이 말했다. 동화는 동화로 두는 게 어떠냐고, 굳이 애써서 순수함을 훼손(?)해야겠냐고. NoNo 설마 하니 성격파탄에 염세주의로 가득 찬 비관론자처럼 모든 걸 삐뚫게 보자는 게 아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의 엔딩. 살짝 맹숭맹숭한 것 같으면서도, 모두를 미소 짓게 하는 행복한 결말이다. 하지만 동화 속 주인공들은 매일, 단 한순간도 불행이나 힘든 일이 없는 꽃길만 걸었을까.


어느새 마흔을 넘기고 보니 이제는 안다. 누구나 속사정이 있다는 걸. 돈이 넘쳐나는 재벌도, 권력을 가진 정치인도, 돈&인기를 한없이 누리며 만인의 부러움을 받는 연예인도. 그 누구도 행복은 100, 불행은 0인,  그대로 행복만으로 충만한 퍼펙트한 삶은 없다. 살다 보면 좋을 때도, 힘든 때도 있지만,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고 나서 돌아보면 '그래도 좋은 시간이었지' 하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합산하면 대체적으로 '잘 살았네' 내지 '이만하면 행복하지'라고 하는 게 아닐까.


누구나 굴곡 없는 삶은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 동화 속의 그녀들의 삶도 매일 매 순간이 행복으로만 가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고, 밝고, 긍정적이고, 용감하게 그 시간들을 마주하고, 슬기롭게 견디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에 이르렀으리라.


살림과 육아, 업무 등등 숨 돌릴 틈 없는, 빡빡하고 치열한 삶을 사는 K-워킹맘들과 나누고 싶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조금 지나면 다시 숨 돌릴 틈이 생기고, 조금 더 지나면 웃으며 지난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가 되면 힘들었던 시간들조차 그립고 아련한 예쁜 추억이 되어 있을 거라고.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틀림없이 '우아하고 예쁜 공주'니까, 오늘도 파이팅!



작가의 이전글 안 먹고 안 쓰면 된다고? 벌어서 쓰고 삽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