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병에 걸렸다. 가게를 닫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글 쓰는 것 만한 게 없었다. 처음엔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도 내 존재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요사이 좀처럼 찾아볼 수 없던 존재감. 그런데, 점점 글을 배워가자, 여기저기서 신춘문예 글쓰기를 가르쳐주기 시작하였다. 신춘문예, 멋져 보였다. 작가가 되면 더욱 확고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글 쓰는 사람들 주위를 휘적거리다 보니, 어느 날 작가병에 걸렸다.
글을 막 배우는 초짜가 작가병에 걸렸다. 마치 이제 물장구 배우는 아이가 다음 도내 대회 수영 경기를 걱정하는 꼴이었다. 사실 작가병이 뭔진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스스로 칭했을 뿐이다. 이걸 병이라는 말 말고는 딱히 규정할 것을 못 찾았다.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닌 #작가가 되고 싶은 병
병이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 병에 걸리니 장점도 있고 단점도 생겼다. 마치 뱃병에 걸려 며칠을 굶으면 절로 다이어트가 되는 것처럼.
먼저 장점이라고 하면 예전엔 몰랐던 ‘낭만(?)’같은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은 우울함이나 상실에 대해서도 어떤 생각들을 찾게 되었고,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재미가 생겼다. 평소에 지나쳤던 ‘없어진 존재감’, ‘외로움’, ‘모멸감’. 이런 감정들을 되새겨 보며 ‘두려움’을 학습하곤 하였다. 이런 재미는 진한 허세와 함께, 맹맹한 현실을 잊게 해 줬고, 오글거리면서도 묘한 망각을 맛보게 해 줬다. 가끔 정도가 지나칠 때면 ‘자나팜(신경안정제)’ 한 알을 챙겨 먹곤 했다.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자나팜
이 병은 이런 멋진 장점과 달리,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단연 큰 단점은 현실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냥 혼자 ‘망상’에 빠지는 게 좋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이 상태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익히 경험해온 지라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글쓰기조차 싫어진 것이다.
작가병인데 글쓰기가 싫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 ‘끄적이는 것’이었는데, 작가병에 걸리니 한 글자도 쓰기 힘들었다. 자판을 두드려야 할 손가락이 핸드폰 게임에 빠져 며칠을 액정화면만 두드렸다.
#게임 내 맹주 등극
머리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치 돈벌이가 되는 기획서 아이디어처럼 날아다니는데, 글쓰기가 싫었다. 보통은 생각이 떠오르면 썸네일로 만들어, 서랍 안 초콜릿 쟁여놓듯, 쌓아놓곤 하였다. 그러나 작가병에 걸리니 머리에만 맴돌 뿐 현실화되진 않았다. 그냥 맘속으로 ‘이렇게 쓰면 짱 멋진 글이 될 거야’, ‘아! 이런 생각을 내가 하다니 천재인가 봐’, ‘이게 글로 나오면 사람들 깜짝 놀랄 텐데!’라는 망상들만 떠돌았다. 구현되진 않는 이유는 진짜 망상들이라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망상이든 뭐든, 끄적이고 싶은데 온 몸이 거부했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할지언정 작업실에 있었다. 언제라도 글을 쓰고 싶으면 책상에 앉을 수 있게, 의자 뒤 소파에 누워 있었지만, 글은 써지지 않았다. 생각만 할 뿐이었다.
#결국 근 한 달 한 글자도 못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