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용 시점 태그 소설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 유투버가 오랜만에 노래 리스트를 올렸다. 노래들은 모두 우울했지만 달콤했다. 좋았다. 우울한 건 싫지만, 우울함에 취하는 것은 좋다. 맨 처음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가수가 누굴까 리스트를 열어보니, 뜬금없이 두 번째 노래 제목이 맘에 들었다.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문득 네가 떠올랐다. 뜨거운 샤워 후 맥주가 생각나듯, 취기에 전 연인에게 전화하는 누군가처럼, 별 이유 없이 네가 떠올랐다. 맘에 드는 노래를 들을 때, 딱히 떠올릴 사람이 없다 보니 너를 회상할 뿐이다. 기억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미화된다. 잦은 회상에 너의 얼굴이 박보검, 남주혁으로 바뀌어 간다. 원래 얼굴 기억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리 싫진 않다. 노래만 감상하기엔 아쉽다. 센치해지는 가을엔 안주가 필요하다.
# 한 번 더 너를 떠올려 보았다.
콧등이 두근거렸다.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가 났다. 여름을 끝내고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엔 묘한 냄새가 공기에서 난다. 살짝 낮아진 공기 온도가 콧속에서 냄새처럼 느껴진 탓일까.
오늘도 그 냄새가 났다. 퇴근하여 471번 버스를 타고 양재에서 광화문으로 가던 길이었다. 버스 안 공기가 텁텁하여 창문을 조금 열었다. 옆 사람 머리가 흩날릴까 싶어 손으로 바람을 누그러뜨렸다. 그때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들어온 바람에 그 냄새가 묻어 있었다.
생소하지만 살가운 광물 냄새. 이 냄새가 느껴지면, KBS '토요명화' 주제가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어릴 적 다 같이 잘 때, 이불속에서 들었던 그 음악. 영화가 시작하면 부모님은 우리에게 잠을 재촉하였고, 지금처럼 불면증이 없던 그때는 눈만 감으면 금방 잠이 들었다. 잠결에 들었던 그 음악은 마치 다른 공간의 문을 여는 아득한 알림음 같았다.
# 버스가 남산을 오르고 있었다. 까만 1호 터널이 보여, 급히 창문을 닫았다.
30분쯤 일찍 도착했다. 교보문고를 들러, 만화책 ‘허니와 클로버’가 새로 들어왔나 둘러볼 요량이었지만, 번거로워 먼저 약속 장소로 갔다.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아래에는 ‘2006 秋! 도심별밤 페스티벌’이라는 현수막이 펼쳐져 있었다. 보도블록에는 여러 개 조명이 달려있는 작은 단상과 스무 개쯤 되는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지나는 사람들과 의자들이 붐비고 있어, 중앙계단으로 올라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았다.
나처럼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미 일행을 만난 사람들. 넉넉히 어둡고 넉넉히 밝았다. 상기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적당한 두근거림이 진동하고 있었다. 귤색 가로등 조명에 말갛게 빛나는 은행잎들이 팔랑이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살구색 세로 배너들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 구석에서 신데렐라 유리구두 한 짝 떨어져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 수 십 번도 더, 너와 만났던 곳인데, 낯설었다. 낯설고 익숙했다.
# 헤어진 지 4년 만에 다시 만나는 날이어서 그런가.
건너편 주한미군 대사관과 KT빌딩이 보인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볕이 모두 사라진 서울 하늘은, 그날따라 유독 까맸다. 도시조명에 별은 사라지고 달도 보이지 않았다. 빛을 반사할 구름마저 없는 밤하늘은 빛 흡수율 99.9%의 반타 블랙이었다. 요란하게 빛나는 땅 때문에 칠흑 같이 어두워져 버린 하늘. 고요하고 적막한 까만 블랙홀.
정신이 팔려 하늘을 보고 있을 무렵, 눈앞에 무엇이 아른거렸다. 네 손짓이었다. 짙은 남색, 밝은 회색, 하얀 셔츠에 어두운 타이를 맨 슈트가 귀여웠다. 서로 호들갑스럽게 인사하지 않아 좋았다. 별말 없이 가만히 웃으며 건넨 인사. 천천히 눈을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은 순간.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부담 없이 마주 볼 수 있었던가. 그때 너의 까만 눈동자도 9월의 밤하늘이었다. 흡수율 99.9%의 반타 블랙. 고요하고 적막한 까만 블랙홀.
#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