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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 Feb 24. 2024

결핍의 자유

'패배는 나의 힘(황규관 시집, 창비 2007)

돌이켜보면 소용돌이 같은 상처에서 나는 자랐고

아물지 않은 흔적으로

세상에 맞서왔지만


말이 되지 못해 스스로 어두워진 상처가

지금도 용암처럼 넘쳐나와

나를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규관, '상처에서 자라다' 중


 "넌 아빠 닮아서 뭐든 하면 잘할 거야." 막연한 기대만큼 숨 막히게 하는 것이 있을까. 어른들은 늘 자신의 자녀에 대한 과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난 부모님이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칭찬의 기능이랄까. 칭찬이 누군가를 움직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 칭찬은 비난과 구분하기 어렵다. 오히려 담백한 비난보다 더욱 무겁게 누군가를 짓누르는 것이 될 수 있다.

 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한 아버지가 나와서 자녀를 교육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너 그렇게 공부해서는 의대 못 가."

 꿈을 응원하는 것만큼이나, 잘못했을 때 지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한 마디에 서글펐다. 왜 그런고 하니, 경쟁의 언어와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경쟁의 언어를 체화시켜, 능력주의의 그림자를 그대로 받아들일까 봐 걱정되었다. 경쟁의 언어는 연대를 부수고, 서로를 '급'으로 나누어 보게 하는 단절의 언어와 다름없다. 능력주의의 한계. 본인의 능력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좋은 대학을 갔다고 느끼는 마음이 쌓이면, 그 노력에 도움을 준 다양한 환경적 요소에 감사하는 법에 소홀해지기 십상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노력해서도 좋은 성적을 못 거둔 학생들이다. 그들은 늘 어른들의 희망을 무겁게 짊어지고, 니체가 말한 낙타처럼 순종하며 산다. 그들에게서 상처는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이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는 대학 이후로 유보된다. 결핍은 부끄러운 것이 된다. 적응하지 못한 자신이 결핍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들 알고 있다. 우리는 상처와 결핍이 있기에 서로 기댈 수 있는 존재하는 것을. 상처가 넘쳐 나와 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핍의 자유를 갖고 있다. 다른 말로 서로 기댈 수 있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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