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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담, 시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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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이 Dec 22. 2023

오래된 의자

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바탕 쏟아지던 날

너는 우리 집 담벼락에 서 있었지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가 또렷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웠어

어떻게 이렇게 예쁜 너를 버릴 수 있었을까

너를 기어코 끌고 들어가

닦았어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나는 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오랫동안 쓰다듬었어 잠들 때까지


턱 밑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누군가 물었어

자?

움직이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고

어둠 속을 응시했어

그곳에 네가 있었어

새초롬한 얼굴을 한 네가

활짝 웃으며

자?


네가 입을 벌릴 때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보였어

개미들이 알을 옮기고 뛰고 있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고

커다란 산과 바다가 점점 멀어지다 보면 하늘이 보이고

폭발이 난무하는 우주 속에서 행성들이 나타났어

난 숨을 쉴 수 없었어        

정말 우주 속에 던져진 것처럼

금방이라도 몸이 터질 것 같았어


오늘도 그렇게 숨 막히는 아침이 밝았어

내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어


오랜만에 집에 온 어머니가

아휴 흉측해라 하며

너를 버렸어

반쪽짜리 내 얼굴도 다 네 탓이라며

빨간 그림이 그려진 종이 쪼가리를 붙여 내놓았어


그제야

담벼락 밑에 버려진 너는 내가 알던 그 의자가 아니란 걸 알았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던 그 느낌이

그리워졌어

수많던 행성들이 마치 내 고향인 것처럼


나는 기어코 또다시 너를 가져와 그 밑에 잠들었어

그리고 영영 우주를 떠돌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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