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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누운 사람

자기 확신의 배신은 아픔!

by 화수분

'후두둑'하고 눈길 위로 내동댕이쳐질 때, 그 사람은 비명소리를 내거나 눈을 질끈 감지 않았다.

지금도 눈을 뜨고 이 상황이 뭔가하고 파악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이 선글라스 앞으로 가까이 지나가고 파란 하늘은 반쪽만 보이고, 귀 앞의 뺨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 어깨를 깔고 모로 누운 자세가 불편했고 길바닥에 닿아있는 엉치께가 뻐근하기도 했다.


'이게 뭔 일인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각하기 전에는 의아했다가, 스스로 감각이 통증으로 느껴질 때쯤에야 그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빙판에 넘어진 걸 제대로 인지했다.


일반차량이 통제된 눈길 위로, 국립공원관리사무소 레인저차량의 깊은 바퀴자국이 밭고랑처럼 길게 뻗쳐있고 그 사람은 지금 그 위에 걸쳐져 누워있다. 그 사람은 일행이 다가와 부축할 때까지 그대로 생각에 잠겨 누워있었다. 누웠다기보다는 차바퀴 고랑에 처박혀 있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그 사람은 머리가 조금 띵했지만 일행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서 모자도 고쳐 쓰고 나뒹구는 스틱을 찾아서 집고 일어서 보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여서 일행 두 사람도 일단 한시름 놓고, 넘어진 순간에 대한 토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천천히 움직여봐요, 빨리 일어날 필요 없어."

"아니, 누가 저렇게 넘어져서 안 일어나고 누워있나 했더니 언니였어?"

"아이젠 한벌을 하나씩 나눠 차고 내려가자."

"마지막을 항시 조심해야 돼."



세 사람이 2024년 설명절 끝자락에 지리산에 갔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자고 다음날 몇 시간만 산행을 하고 오려는 계획이었다.

성삼재까지는 차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한 시간쯤 올라가면 노고단대피소가 나오니 접근성이 좋아서 지리산 등산객들에게는 이곳이 인기가 좋았다. 더군다나 최근 새로 지은 노고단 대피소를 오픈했는데, 캡슐형 객실이라 다른 대피소에 비하면 호텔급이라고 일행사이에 호평이 거듭되던 참이었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지리산엔 눈이 쌓여 있었다.

천은사 방향으로 진입한 도로는 '시암재'까지만 제설이 돼있고, 거기서부터 성삼재까지는 차를 놓고 눈 쌓인 도로를 걸어가야 했다. 제설작업을 하지 않은 도로는 여러 날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데다 사람발길에 다져져 이미 빙판이 된 곳도 많았다. 지리산으로 드라이브를 나섰던 사람들도 교통통제로 막힌 도로가 아쉬웠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려 '시암재~성삼재' 구간 눈길도로를 재미 삼아 걸어 다녔다.


세 사람은 호텔 같은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네시쯤 노고단 정상(1507m)에 올랐다.

칼바람 부는 정상에서 새해기원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한 시간 만에 대피소로 내려왔다. 저녁밥을 해 먹으려고 취사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의 음식냄새가 먼저 허기를 불러온다. 세 사람도 준비해 간 고기반찬으로 풍미 가득한 저녁을 잘 먹었다. 대피소는 8시에 소등이라니 부지런히 취침 준비를 하고, 각자 막힌 공간에 누웠지만 깊은 잠은 못 잤다. 세 사람은 다음날 아침에 또 한 번 노고단정상에 다녀왔다. 일출과 운해가 아름다워서 어제 오후보다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날씨도 덜 춥고 바람도 잠잠했다.




세 사람은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노고단대피소를 떠나 성삼재로 내려왔다.

만복대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고리봉에서 돌아와, 어제 걸었던 찻길 통제구간을 또 걸어 내려갔다.

오늘은 따뜻하고, 바람도 고요한 날씨 덕분에 햇볕이 드는 구간은 도로의 눈이 녹고 있었다.

그늘진 구간은 아직 쌓인 눈밑으로 투명한 얼음이 칼날같이 번득였다.


세 사람이 눈길에 들어서고 얼마 안돼, 키가 좀 크고 등산객이 아닌 차림의 중년부인이 길바닥에 미끌리며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가족들이 달려들어 걱정하는 소리를 내면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지나치다가 셋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


'왜 넘어지고 그럴까?'

'균형을 잘 잡고, 발 끝에 힘을 딱 주고.'

'이렇게 이렇게 걸어야...... 직???...... 윽!!!'



조금 전 미끄러져 주저앉았다가 가족들 부축으로 겨우 일어난 중년부인도 방금 저기 아래쪽에서 빙판에 패대기 쳐진 그 사람을 보았다. 그 중년부인은 생각했다.

자신이 조금 전에 넘어진 것은,

'아직도 누워 있는 저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저 사람이 일어날 수 있을까?'

'119를 불러야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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