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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안원장은 부재중
by
화수분
Feb 21. 2024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물을 반 잔쯤 마셨다.
오늘 아침엔 물도 먹지 말고 금식하라고 해서 12시간 동안 빈속을 유지하고 복부초음파 검사를 했다.
어제 혈액검사도 해뒀으니 오늘 그 결과도 함께 볼 참이다.
내가 10년 넘게 다닌 병원은 안원장이 처음 오픈한 신도시의 소화기내과였다.
한창 개발 중인 신도시에 병원을 차린 안원장은 웃는 얼굴이 앳된 소년처럼 해맑았다.
말속이 사근사근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하는 말을 성의껏 들어줬다.
젊음의 에너지가 충만해서 내게도 그 기운을 나눠줄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안원장이 개업한 소화기내과는 날로 번창했다.
처음엔 3층 건물의 한 개 층을 쓰다가, 얼마 후엔 건물 전체를 병원이 차지했다.
진료실이 추가되어 안원장이 1 진료실, 다른 의사가 2 진료실에서 진료를 보고 직원들도 늘어났다.
병원 내부의 동선도 복잡해져서 바닥의 화살표를 잘 보고 검사실을 찾아다녔다.
친절하고 자상한 안원장의 병원이 번창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마치 내 조카의 발전을 보는 것처럼 뿌듯했다.
나뿐 아니라, 그 신도시에 처음 생긴 안원장의 병원을 다닌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그동안 그 병원과 안원장에 대해선 나쁜 평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세월은 가고 나도 신도시에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몇 개월 후 신도시의 메인 도로를 지나는 길에 전에는 못 보았던 새하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오, 누가 세련된 마감으로 건물을 잘 지었네.' 하면서 눈여겨보고 지나쳤다.
얼마 후 안원장병원에서 정기검진 안내문자가 왔다.
주소가 변경됐으니 어디 어디로 찾아오라는 문구와 함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도 거기서 할 수 있다고 했다.
안내된 주소로 찾아갔더니 전에 눈여겨보았던 하얗고 예쁜 건물이 안원장의 새 병원이었다.
같은 건물에 각층마다 치과, 산부인과, 정형외과도 들어와 있었다.
안원장의 소화기내과는 고급진 인테리어와 쾌적한 대기실을 갖춰 놓았다.
내시경 전담의가 새로 왔고 진료실도 더 생기고 직원들도 또 늘어났다.
근사한 병원에서 검진을 마치고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셨다.
예전에 그 동네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이 내 앞에 와서 깜짝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 복도를 지나다 보니까 oo님이 혼자 다소곳이 앉아계시네. 어쩐 일이세요?"
"아이고! 반가워요. 여기 병원에 왔다가요. 커피 한잔 같이해요" 내가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꼭 안원장한테만 간다고 해서 지금도 여기로 모시고 와요. 진료보고 가면 저녁때 어떠신가 안원장이 전화를 또 해주니까 우리 어머니는 여기밖에 몰라요. 얼른 올라가 봐야 해요."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 진료를 예약해 놓았다고 지인은 부지런히 되돌아갔다.
난 속이 불편할 때도 안원장을 찾아갔지만, 우울증에 걸려들었을 때도 맨 처음 안원장을 찾아갔었다.
내 손을 잡고 전해주던 따뜻한 체온이 고마웠다. 그때 소년 같았던 그의 얼굴에도 잔주름이 보이고, 이마를 깔끔하게 보여주던 머리칼에도 희끗한 세월의 흔적이 찾아온 걸 보았다. 세월 참 무상한 것.
불면을 호소하던 내게 안원장이 신경안정제와 수면유도제를 처방해 주었다.
그때 난 약의 도움은 별로 못 받았다. 지금 내 기억에는 안원장이
손으로
전해준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오늘 검진결과는 모두 별이상이 없다고 했다.
혼술과 폭식에 죄책감을 가진 나는 신체 이상증상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병원에 잘 간다. 정상결과를 확인하고 안심하고 어느새 또 먹고 있지......
하필 내가 병원에 간 날 안원장은 부재중이었다.
요즘 정치권의 난제인 의대정원확대문제로 대책회의에 갔나?
아니면 진정한 휴식이 필요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가셨나?
오랜만에 여전히 맑고, 밝고, 향기기 날 것 같은 안원장님의 환한 미소를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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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봅니다. 빛나지 않아도 엄연한 나의 역사! 부끄럽지만 보따리를 풀어보자. 차곡차곡 모았다가 가끔 꺼내보려고, 철지난 이야기도 브런치 글창고에 칸칸이 넣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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