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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꽃향기

- 작은 당신, 꿈에라도 오세요

by 화수분

"장에 좀 갔다 올라고요. 돈 좀 줘봐요."

"얼마나?"

"긍게요, 얼마나 들랑가 몰르겄네, 있는 대로 줘봐요."

"뭔 돈을 있는 대로 달랴?"

"옛다, 다 가져가라"

마당으로 종이돈이 흩뿌려졌다.




상고머리 소녀가 혼자서 마루 끝에 앉아있다.

반들반들한 널빤지 마루 가운데에는 서까래를 받치는 둥근 나무기둥이 서있다.

소녀는 그 나무기둥에 등허리를 굽힌 채 기대고 앉아 깜깜한 흙마당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왜 안 자고 거그 앉았냐?"

"느엄마 금방 올텡게 얼렁 들어가 자라."


소녀의 아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가 마루 끝에 앉아있는 소녀를 보고 나무랐다.

아빠가 마당에 내려서서 담배를 한대 태우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소녀를 재촉했다.

소녀는 아빠말에 대답 없이 앙칼진 눈빛으로 뚫어지게 마당만 쏘아보고 있다.

소리 없이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낡은 티셔츠 앞자락을 잡아 올려 눈물을 또 닦았다.


아홉 살이나 됐을까?

상고머리 소녀는 까무잡잡하니 야물게 생긴 이 집 막내딸이다.

어둠 속을 응시하는 막내의 눈동자에 갈색 홍채가 열리고 사물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대문간의 오른쪽에 서있는 벽오동나무가 어렴풋이 거인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벽오동 나무는 작은 여자아이의 키를 훌쩍 넘는 시멘트블록담장 안쪽에 서있다.


은색 양철 대문은 한쪽이 열려있고 큼지막한 삼각형 돌받침대로 괴어져 있다.

대문 왼쪽엔 마루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해묵은 엄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엄나무는 해마다 새 가지가 돋고, 새 가지마다 가시도 촘촘히 돋았다.


벽오동 나무가 거인손바닥 같은 잎들을 달고 우뚝 서있는 그 밑으로 엄마의 화단이 있다.

앵두나무, 병꽃나무, 작약, 수선화, 어느 집 화단에나 있을법한 화초가 그득하다.

요즘 꽃밭에는 여러 가지 꽃이 한꺼번에 피어있기 때문에, 오늘밤 마루 끝까지 흘러온 꽃냄새를 소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오늘밤 아이가 오롯이 눈과 귀를 열어놓고 탐색 중인 실마리는 '엄마의 기척'뿐이다.




이 집 안주인 고잔댁은 식구들 저녁을 해먹이고 해거름에 대문밖으로 나가서 아직 안 돌아왔다.

작은 키에 오동통한 고잔댁은, 늘 양팔을 가슴에 모아 팔짱을 끼고 기우뚱거리면서도 암팡지게 걸어 다녔다.

오늘 저녁에도 그렇게 고샅길을 걸어서, 아마도 뒷집 의철이네 집에 마실을 갔나 보다.

아니, 오늘은 마실이라기보다는 가출에 가까울 것 같다.


아까 남편인 이장양반에게 장보기 할 돈을 타려다가 동티가 나서, 그 양반이 마당에 종이돈을 뿌려버렸다.

고잔댁이 마당에 엎드려 종이돈을 주워 모았다. 다시 추린 돈을 벽장 안쪽에 넣어두고 묵언수행으로 저녁밥을 해서 밥상만 방에 들여주고 고잔댁은 굶은 채 집을 나섰다.


'식구들은 모두 자고 있을까?' 고잔댁은 아이들 생각에 좀 심란해졌다.

아무리 이물 없이 지내는 이웃이라 해도 밤시간에 남의 집에 머물기도 여간 가시방석인데 마침 의철이 엄마가 한소리 한다.

"아이, 아짐니, 오늘 뭔 일이요? 집이 안 가요?"

"아이고 인자 가야지. 이렇게 깜깜해진지도 몰랐네." 고잔댁이 일어서며 짐짓 핑계말을 흘렸다.


고잔댁은 앞가슴에 양팔을 얹어 팔짱을 끼고 검은 고샅길을 내려다보았다.

한걸음 한걸음 세듯이 더딘 발걸음을 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배도 고프고 속도 쓰리고 한숨도 나왔다.


그녀는 집안 살림에 애들 키우고, 논일 밭일도 여자일 남자일 안 가리고 척척 해왔다.

새새로 텃밭에서 나는 푸성귀를 예쁘게 단장시켜서 내다 팔기도 했다.

그녀는 시골에서 그나마 돈 만 질 일을 궁리해 가며 규모 있게 살림을 잘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돈이 급할 때면 고잔댁을 찾곤 했다.

언제든 그녀의 안주머니가 마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고잔댁이 시름에 잠긴 채, 열린 은색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 받침돌을 밀어내고 열린 문을 닫고 가로쇠를 당겨 대문을 잠갔다.


뒤돌아 집안으로 향하던 그녀는, 밤의 화단에서 풍겨 나는 꽃향기에 걸음이 멈춰졌다.

그녀는 잠시 제자리에 섰다가 왼쪽으로 몸을 돌려 화단 앞으로 걸어 갔다.

어슴프레 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귀한 화초들이 오늘밤 어둠 속에서 더 귀하게만 보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꽃향기를 맡아보고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내일 아침 아궁이 재를 퍼내서 담장밖 남새밭하고 이 꽃밭에 두둑이 덮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잔댁이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토방 위에 신발을 벗고서 마루에 한발 올리다가,

"아이구 아가!"

마루기둥 옆으로 꼬꾸라진 채 잠이 든 막내딸을 감싸 안았다.

고잔댁의 발끝에서 날아간 신발 한 짝이 흙마당에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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