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기억의 중첩'이 때로는 달달한 차 안의 분위기를 몹시 당혹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데이트 중인 남녀사이에 흔하게 등장하는 그 멘트.
"나랑 여기 왔었다고? 언제?"
모름지기 데이트를 할 때는 남녀 공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묵묵히 감상하시고,
섣불리 감상에 젖어 엇갈린 옛 기억을 소환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지 싶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그곳, 장소에 대한 감회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곳이 처음 간 곳이라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머--여기가 꼭 거기 같다 야!"
이렇게 '여기'와 '거기'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한 고리에 묶여 기억창고에 저장되고, 풍성한 추억부자까지 될 거니까.
엊그제 친한 사람 넷이서 한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넷 중에 한 분의 생일을 축하하는 점심 나들이였다.
돌아오는 길에 억새꽃이 끝없이 만발한 하천 둑길을 차창으로 보았다.
이맘때면 억새꽃이 흔한 풍경이지만, 이곳 억새군락의 규모가 장관이었다.
앞으로 그곳을 지날 때면 네 사람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리고 회상하는 계절이 언제든,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을 떠올리게 되겠지.
또 하나의 장소, 사람, 풍경, 감동이 함께 세트로 기억 속에 기록되었다.
사진출처 - 동진강 등대마을
장소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기만 할까.
어쩌면 우리들의 뇌리엔 가슴 아픈 기억의 장소가 더욱 깊게 각인돼 있을 것 같다.
가 보고 싶지 않은 곳, 어쩌다 지나칠 때조차 외면하게 되는 곳.
내게도 그런 곳이 있다.
진짜로, 운전하면서 그곳을 지나칠적마다 외면하고 쳐다보지 않는데도, 이미 내 기억 속에서 그 집의 색깔, 마당의 생김새, 내가 심어둔 나무, 이 계절 그 집안 공기의 온도까지 느껴지는데, 이게 외면한다고 해서 안 보이는 거냐고! 이럴 땐 내 기억이 내 눈이 돼 버린 것 같이 야속해진다.
기억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그 시절의 아픔에서 결코 놓여날 수없다.
아픈 기억이, 흐르는 세월만큼 희미해지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내가 그렇게 외면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장소'에 얽힌 글을 연재하면서 차차 풀어내려고 한다.
우리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단초가 되는 것들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를 것 같다.
특별한 날씨, 어떤 사람, 공원의 강아지, 눈에 띄는 물건, 맛있는 음식, 독특한 냄새, 소리, 색깔......
그 무엇에서 촉발되었든, 늘 내 기억 속에 따라다니는 그때 그 장소에 대해, 담담한 마음으로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그게 가능한 작업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도해 보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