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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유희(遊戱)

- 희주삼촌네 마당, 그립다!

by 화수분

큰 길가로 다닥다닥 점빵집들이 나래비 서 있다.

동네에서 제일 터가 넓은 희주네 집은 세탁소와 화장품집, 양복점 이렇게 가게 세 개를 도로가에 세놓고 있었다. 대문 안쪽에 앞마당을 질러가면 주인집, 주인집 왼쪽 옆으로 돌아가면 안채에 딸린 셋방이 있었다.


널빤지 마루와 두 칸 크기의 방, 마루와 연결되는 부엌을 갖춘 셋방에 우리 세 식구가 두 해를 세 들어 살았다.

딸아이가 8개월이고 남편은 무주리조트를 개발하는 건설회사의 직원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혼자 내려와 현장숙소에서 살았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두 세 가족만 우리처럼 셋방살이로 무주 산골 생활을 체험했다.




주인집을 포함해 다섯 집이 한 울안에 살았다.

뒷마당 젤 끝에 누렁소 한 마리가 살고 있었고, 그 옆에 공동화장실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외양간 앞을 지나다녔다. 농사철에 주인집 할아버지가 누렁이를 끌고 나가서 쟁기질을 하고 돌아오면, 구수한 여물을 듬뿍 삶아서 황소에게 대접했다. 우리 아기도 무서워하지 않고 누렁이를 바라보고 큰소리로 "맘마 먹어?" 하면서 외양간 앞에서 동동거렸다.


마당 가운데 안채가 있고 앞뒤로 비어있는 너른 공간에서 울안 식구들이 나물도 널어 말리고, 김장도하고, 고추장도 쑤고, 된장도 담그고, 간장도 끓이고, 묵도 끓이고, 그때그때 계절에 딱 맞는 품앗이를 빼놓지 않았다.

난 외지에서 온 새댁이라고 울안 어머니들이 서로 챙기며 친정 엄마처럼 보살펴 주셨다.

나물도 한 보퉁이, 김치도 한 통, 고추장 된장도 앙증맞게 한 단지, 묵도 큼지막한 것 두세 모, 묵 누룽지, 묵 말랭이, 매번 마당이 북적거리고 나면 어김없이 내 것도 생겨났다.

난 큰 살림의 규모를 다 이 마당에서 배웠다.

나 역시 시시때때로 답례를 한다고는 했지만, 내가 그분들로부터 입은 수혜는 애초에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우리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셔서 친정엄마가 안 계신 나는, 그곳 마당에서의 두 해가 각별히 기억에 새겨져 있다.




"야이, 뭐 하나, 여태 자나, 해가 중천이다."

내가 아기와 씨름하느라 새벽잠이 들어 기척이 없을 땐 방문 앞에 와서 작은 소리를 내면서 푸성귀 바구니를 슬며시 놓고 가신다. 상추, 배추, 무, 파, 부추, 고구마, 감자, 산나물, 김치, 논밭에서 나는 것과 산나물까지 모든 걸 얻어먹었다. 점심때가 되면 주인집 마루에 모여서 함지박에 밥을 비벼 먹거나 부침개를 부쳐 먹기도 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끓여주신 콩죽은 지금도 먹고 싶어 마른침만 삼킨다.


뚝딱뚝딱 이집저집에서 들고 나온 양념과 양푼밥과 즉석에서 금방 버무린 나물, 겉절이를 넣고 한꺼번에 쓱쓱 비벼서 한 보시기씩 담아주면 혀 밑에서 침이 막 솟아나는 꿀맛 비빔밥!


"야이, 오늘은 정구지 부침개 구워 먹으까이?"

양복점 아줌마가 시동을 걸면, 화장품가게 아줌마가

"내가 새 지름 갖고 가요---"

세탁소에서

"양념장 해가요---"

주인집 할머니는 처마밑에서 마늘을 후두둑 빼갖고 토방에 앉아 자리를 잡는다.

양복점 아줌마는 벌써 큰 다라이에다 부추를 막 씻고 있다.


난, 우리 아기를 업고 삼선 슬리퍼를 신고 얼쩡얼쩡 돌면서 구경을 한다.

"야이, 가차이 오지마라이. 애기한티 지름 튄다이."

양복점 아줌마 진두지휘아래 너른 채반 위로 부추전이 척! 척! 날아간다.


이웃에 어머니들이 어슬렁어슬렁 팔짱을 끼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아이, 먼 꼬순내가 이케 난댜?"

"어서 와요. 여그 앉으쇼." 양복점 아줌마가 맞아들인다.

" 짠가 싱건 가 맛도 몰라, 시방 간도 안 봤어. 아짐니가 잡숴봐."

"아이, 간이 딱 맞네."

"한 장 더 부쳐봐. 집에 영감 한 장 갖다 주게."


주인집 할머니도 안방으로 작은 막걸리 술상을 들여간다. 할아버지는 여인천지 안마당에 안 나오신다.

그 대신 하늘색 추리닝 바지와 어깨 없는 하얀 난닝구를 입고 헤벌쭉 웃으며 엄마를 따라 나오는 청년.

배불뚝이 희주삼촌이다. 희주삼촌은 다운증후군에 정신연령이 어린이와 같은 주인집 아들이다.

아장아장 걷는 우리 아기가 귀여운지 바라보고 잘 웃었다.


더우나 추우나 옷차림은 변화가 없고 늘 혼자서 휘휘 돌아다니다 해작질을 하고 엄마한테 혼나면 방에 틀어 박히고. 울안에 말동무도 없이 바쁘게 들락날락하는 희주삼촌은 주인집 할머니가 단단히 일렀는지 절대로 나와 아기 가까이에 오진 않았다. 그렇게 희주삼촌은 존재감 없는 주인집의 모자란 늦둥이로 세월을 보냈다.




마당 넓은 집 셋방에서 난 둘째를 낳았다.

그 후에 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같은 동네에서 5일장이 열리는, 장마당이 가까운 곳에 양옥집 독채전세를 살게 됐다.

이사한 지 몇 개월이 흘렀을까? 아침 일찍 희주삼촌이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걸 봤다.

"어? 희주삼촌 여기 웬일이야?"

내가 반갑게 물어도 웃지 않고 입만 달싹거리다가 곤란한 듯 천천히 돌아서 갔다.


그날 주인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에 주무시다가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희주삼촌은 우리가 이사 간 집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부고를 하려고 우리 집에 왔던 거였다. 그러니까 희주삼촌은 바보가 아니고 집안 돌아가는 정황을 다 알고 있었던가 보다.


아버지 초상을 치르고 얼마 후부터 희주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복지시설에 입주했을 것 같았다. 예전에 울안 아줌마들이 그런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희주삼촌은 위로 누나, 형님이 있었지만 대도시에 나가 살았고 명절 때나 한 번씩 다녀갔다. 얼마 후에 우리도 이사를 나왔다.


내가 살던 동네를 다시 가 본 적은 세 번쯤.

스키장 가는 길이 번듯하게 새로 난 후론 일부러 찾아가보질 못했다.

두 번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뒤엔 아는 얼굴을 못 만났다.

양복점 아줌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화장품집은 타지로 이사를 갔고, 그 뒤로는 소식을 모른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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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30대 초반의 몇 년을 차지하고 있는 무주살이의 기억은 생각날 때마다 가슴 찡한 그리움이 되살아난다.

무주군 설천면 남대천에서 즐겼던 소풍, 셋방살이의 다채롭고 훈훈했던 추억, 순수하고 안타까웠던 희주삼촌의 호의까지. 이번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그곳으로 달려가 그 마당 가운데 서 보고 싶다.


"안집 아줌마 계세요?"





***사진출처-EBS골라듄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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