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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집의 옥상

- 눈물 없이 썼습니다!

by 화수분


도시재생 정비사업을 했나 봄


잎이 잘잘한 단풍나무에서 헬리콥터 날개 같은 씨앗이 무수히 날아오른다.

멀리멀리 어지럽게 제각각 아무 데로나 날아간다. 나도 씨앗을 따라 하늘 멀리 시선을 날려 보낸다.

학교 담장대신 서있는 키 큰 단풍나무 때문에 우리 집 옥상에서는 학교 운동장을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매일 몇 번씩 옥상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는 짧은 시간이 좋았다. 옥상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옥상에 서서 노을을 보았고, 옥상에 서서 울었다.


나는 이 골목 끝 막다른 집으로 시집을 왔다.

대학 서클활동을 하며 얼굴만 아는 선후배였다가 졸업 후 우연히 만나 몇 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두 사람은 애틋했고 그 시절 혼기에 맞게 결혼은 자연스러웠다.


신랑의 부모는 아들 결혼하고 살라고 이 집을 샀다고 했다.

신부의 짐이 들어가고 며칠 후 찾아가 보니 시부모의 짐도 들어와 있다.

시부모는 한 20분 거리에서 오래된 가게를 하고 있었고 가겟집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사전에 부모와 함께 산다는 말이 없었고 나는 둘이서만 신혼살림을 하는 줄 알았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있는 나에게 신랑의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

"응, 짐만 넣어놓고 며칠에 한 번씩 왔다 간다는구만"

나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하듯이 한마디 했다.


나는 혼자서 낙심할 뿐 남편에게 따지거나 심히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진짜로 짐만 들여놓고 한 번씩 다녀갈 건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결혼의 조건이나 약속이나 그런 것을 크게 고려할 줄을 몰랐다.

친정부모 없이 언니들이 뒤봐주는 혼사라서 서럽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옥상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새벽참에 시어머니가 들이닥쳤다.

"네가 압력솥이나 쓸 줄 아냐?"

도둑질이나 들킨 듯이 혼비백산 신혼부부가 주방으로 튀어나왔다.

시부모는 그렇게 옥상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았다.


직장을 버리고 전업주부가 된 나는 옥상집의 살림을 맡았다.

시부모는 매일 가게에 나가고, 남편은 건설현장에서 며칠 만에 한 번씩 집에 왔다.

새벽밥을 하고 가게 종업원의 밥도 챙겨주고 점심 도시락도 싸서 내보냈다.


너무 고단하고 외롭고 서러워서 매일 울었다.

일기장엔 눈물이 떨어져 얼룩이 졌다. 첫애를 가졌고 입덧을 했다. 그렇다고 살림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늦여름이 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붉은 생고추를 몇 가마니 사 왔다. 물에 씻은 생고추를 옥상으로 날랐다.

옥상 가득 널린 고추를 뒤집고 널고 반복했다. 비가 오면 비설거지를 하고, 반쯤 마른 고추를 집안으로 들여 말렸다. 온 집안 바닥에 고추를 널고 시어머니는 우리 방문 앞에 베개를 놓고 밤잠을 잤다.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어도 안 열려서 밀고 나왔더니 시어머니가 "에잇"하고 홱 돌아 누웠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겐 아마도 거짓말 같겠지.


고추프로젝트 중간에 내가 유산기가 있어서 병원에 갔다.

태반이 불안정해서 하혈이 있으니 주사 맞고 움직이지 말고 안정하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와서 잇몸이 닳도록 양치를 했다. 메스꺼움인지 어지러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해서 잊히지 않는 고추건조 작업을 마치고, 김장용 고춧가루가 만단히 준비됐다.

시어머니는 흡족한지 씨-익 웃었다. 아기에게 참 미안했다.

다행히 몇 달 후에 난 건강하고 까탈스러운 딸을 낳았다.




언니네서 산후조리를 하고 옥상집으로 돌아왔다. 나 없는 동안 시어머니가 살림을 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돌아오자 시어머니는 그날 곧바로 살림을 멈췄다. 봄이 오는 길목, 날씨는 어설프게 춥고 슬라브 단층집 구조는 아기와 산모에게 충분히 불편했다. 언니네 아파트에서 조리를 받고 지내다가 온터라 옥상집 자체가 신산스러웠다.


옥상집에 처음 온 아기는 밤새울고 새벽에 잠들었다. 너무 울다가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시어머니는 응급실 택시비를 본인이 냈다고 했다. 내가 갚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밤잠을 안 자는 아기는 빨래도 많다. 아침이면 수돗가에서 수북하게 쌓인 아기빨래를 했다. 시어머니는 당신 이불홑청을 뜯어서 아기 빨래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언니네서 돌아온 지 얼마 안돼 난 손목이 시리고 아기를 안기도 어려웠다. 시어머니가 본인이 다니는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왔다. 약값이 15만 원이라고 해서 봉투에 넣어 드렸다. 저녁때 집에 온 시어머니가 "약값이 16만 원 이란다" 그래서 만원을 더 드렸다. 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사는 게 참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울던 아기가 새벽에 잠들면 난 한 시간이나 쪽잠을 자고 퍼뜩 깨서 시아버지 새벽밥을 지었다.

내가 새벽잠에서 깨지 못한 날 시아버지는 굶고 가게에 갔다. 시어머니는 아침잠을 더 잤다.

그날 아침 시어머니 아침상을 차려주고 난 부탁을 했다.

"아기가 밤잠을 안 자서 제가 못 일어나겠어요. 어머니가 아버님 아침을 좀 해 주세요."

"알았다. 그럼 그렇게라도 해야지." 시어머니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끄덕끄덕 했다.


다음날 좀 편한 맘으로 아침잠을 자고 눈 뜨자마자 주방으로 나왔다.

밥을 지은 흔적이 없다. 시어머니는 안방 아랫목에 벽을 보고 누워있다.

시아버지는 굶겨 보내고 시어머니는 시위 중이다.


그날 며칠 만에 집에 온 남편이,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하라고 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밥 하라고 시켜서 서럽고 노엽다고 했다.

이삼일 지나고 나는 억지 사과를 했다. 사는 게 참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집 식구들이 참 이상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정부를 들이지 그랬어요?"라는 질문을 남편에게 몇 번 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결혼하고 일주일 만에 '잘못됐구나'하는 판단을 했고,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용기가 없어서 일찍이 도망가지 못했고, 아이가 생기고 이혼은 꿈일 뿐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분가를 주장했다.

부모에게 말 못 하던 남편이 마침 형제간에 싸우는 기회가 있어서 2년 만에 분가를 했다.

13평 전세 아파트로 이사 가던 날 '해방'이란 것을 절감했다. 8.15 해방이 이보다 좋았을까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2년, 길지도 않구먼 그땐 끝이 없을 눈물의 세월이었다.

내 마음의 상처와 응어리를 낱낱이 써내자면 두툼한 책 한 권은 너끈히 나올만했다.

법정스님이 명저로 꼽은 책, 소로의 <월든>도 콩코드 호숫가에서 2년여 살면서 기록한 일기책이 아니던가.


홀로 옥상에 서서 느꼈던 그 막막함, 남편에 대한 원망, 내 인생에 대한 절망.

난 지금 다행스럽게도 막막하기만 하던 꿈을 이뤘다. 그것도 전남편 덕분에.

결혼 일주일 만에 잘못된 결혼인 것을 알았고 25년을 살았다.


혼자가 된 지 10년이다.

딸과 아들은 자리 잡고 잘 살고 있고 나도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잘 산다.

젊은 시절 북받치던 감정은 사그라지고 이젠 기억만 남아서 '상처'는 '글감'이 되었다.

지금 잘 살고 있으니 됐다!


그 동네 그 집도 그대로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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