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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와 나

- 내가 만약 가택연금 된다면?

by 화수분 Jan 24. 2024

2주 전에 독립영화관에서 <길위에 김대중> 다큐 영화(감독 민환기)를 보았다.

김대중(1924~2009, 향년 85세) 전 대통령(15대, 1998~2003)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봉한 영화다.

그분이 젊은 시절(20~30대)에 이미 상선을 수척 거느린 인물 훤칠하고 유능한 사업가였고, 같은 시기에 정치에 입문한 열혈청년이었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가 내게 기억되기 시작했던 모습은 노년의 얼굴, 펭귄을 닮은 절뚝거리는 걸음부터였으니 영화에서 본 청년시기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고 조국과 함께 질곡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정진했다. 그가 육성으로 호소하는 대중연설에는 민중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부독재하에서 대중의 지지는, 집권세력에게는 위험인물로 적대시되었다. 한 인간으로서 겪어낼 수 없는 수난의 길 위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큰사람으로 성장하였다.


의문의 교통사고, 납치, 투옥, 사형선고, 가택연금, 망명에 이르는 고난 속에서도 어떤 힘이 그를 죽지 않고 버틸 수 있게 지켜주었을까?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난 금세 포기하거나 우울증에 공황장애가 와서 무너지고 말았을 것 같은데......


브런치 글 이미지 1




일요일 아침 창을 열고 집 앞 방죽을 내려다보니 물이 가득 차서 반짝거리고 왜가리와 청둥오리가 함께 노닐고 있었다. 바깥날씨가 춥지 않아서(8도) 거실창을 반쯤 열어둔 채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물이 많아졌으니 방죽을 저수지라고 해야겠다.

물새소리가 두 가지로 들려온다.

'푸드드드드' 청둥오리 날개터는 소리.

'위익-- 위익--' 청둥오리 친구 부르는 소리.


저수지주인인 흰 왜가리 일백이가 의젓하게 물속에 두발을 담근 채 아까부터 같은 자세로 서있다.

어쩌면 내가 이 동네에서 저 저수지와 흰 왜가리를 가장 긴 시간 지켜보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저수지를 긴 시간 지켜보다가 흰 왜가리를 '일백이'라고 이름 지었고, 일백이가 항상 저수지에 살고 있으니 그를 '주인'으로 부르기로 했다. 일백이 친구 이백이, 삼백이, 사백이도 드물게 찾아오고 엊그제는 깃끝이 까만 반백이도 왔었다.


오늘은 일백이 주변으로 청둥오리 열다섯 마리가 움직인다. 혼자 있는 일백이 보란 듯이 코앞으로 지나간다.

대형을 갖추고 물 위를 쓱---유영하다가, 일제히 날아서 둑으로 올라갔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맥질을 해도 일백이는 미동도 없이 눈길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일백이는 관리자의 입장이겠지.

물새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름답고 둥근 물결이 수면 가득 물그림을 그리는데 망원렌즈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저수지에 물이 적을 때는 일백이만 그곳을 지키고 청둥오리들은 저 아래 하천에서 노니는 걸 봤다.

일백이도 가끔 제 구역을 떠나 아래 하천에 다녀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난 '일백이가 언제 오나' 하고 기다리게 된다.


오늘 저수지 풍경을 내려다 보면서 불현듯 김대중영화에서 보았던 '가택연금'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집에 갇혀서 나갈 수 없고 감시의 대상으로 살게 된다면 나는 얼마큼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한 필지 만한 저수지를 바라보다가 새들의 '무한자유'가 부러워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내 집에서 내다볼 수 있는 풍경만으로도 얼마간은 견딜 수 있겠지만, 긴 시간 자유를 속박당하고 견딜 자신은 없다. 아마 난 시든 꽃처럼 말라서 사그라 질 것 같다. 어느새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겠지.

아, 내 인생의 가택연금은 '병상'이 아닐까? 가택연금이든 병상연금이든 짧을수록 환영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지만 자신의 서식지를 지키고, 무시로 친구들이 왕래하는 일백이의 삶이 참 이상적인 모습이구나 싶다. 지금 나의 삶과 닮아있다. 내가 일백이를 찾아내 친구삼은 것은 우리 둘이 통하는 데가 있어서 그랬나 보다. 흰 왜가리 일백이의 변함없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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