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갈까
훅 달려든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촉이 그 보라며 나선다. 비슷한 이름, 어디선가 본 듯한 눈망울,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기억이 추억으로 포장해 파고든다. 가슴에 미묘한 바람이 강의 준비에 쏟았던 그동안의 정성을 백지로 만들어 버린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최백호 노랫말을 달고 살았는데, 기연미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백주에 드러났다.
아연 상대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진지한 모습으로 마주 선다. 쉬는 시간에 찾아와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40여 년 세월을 대번에 뛰어넘는다. 익숙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향과 연령대, 전공과목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며 대견해했다. 우연에 허를 찔린 기쁨이 메말라가던 추억에 마중물을 붓는다. 그녀에 대한 밀려오는 궁금증을 애써 참았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자매라는 동질 유전자가 얼굴에 남아 있다.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그러자 듣기만 하라는 듯 순식간에 상상치도 못했던 사연까지 뱉어버린다.
예비고사 치러가서 고사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돌아와 여러 달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몇 년 후 대구에 다녀와 정신 줄 놓기를 일 년이 지나고서 쫓기듯 선을 보아 결혼했다.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 지금은 권사라며, 남편과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말까지 쏟아낸다.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유영하던 첫사랑은 그렇게 내게 와 현실이 되었다. 그녀가 예비고사를 치르지 않은 까닭까지 개입되었다고는 진정 모를 일이다. 이후 사연은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만, 고독에 내맡긴 채 전신을 물어뜯기며 위안 삼은 것인지도 모른다.
형이상학적인 망상에서 벗어나 일찌감치 현실에 눈을 떴다. 비정한 벽을 느꼈거나, 꿈 많던 소년 시절에 품었던 환상의 막이 걷히면서 나락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충만한 이상을 품었던 미술학도 가면이 벗겨진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붙어버린 젖은 낙엽 신세를 여과기 거치지 않고 보았으리라. 결국 잘해야 배고픔만을 면할 처지라고 단언했다. 순식간에 사춘기적 마법이 풀리자, 첫사랑은 추억의 저편에 남겨두자며 결론 내렸다.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며칠 동안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 없어 술을 탐했다. 기력이 달린 데다 상한 음식까지 들어가자 꼬박 보름을 앓았다.
하늘의 응징이라 겸허하게 받아들이기엔 수반된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 작업실 회백색 벽면에 걸린 그림 속으로 빠져들면서 허우적댔다. 단아한 구상화가 뜨거운 추상화로 일그러지며 확대되자 불구덩이로 변했다. 벗어나야 했다.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 꿈을 빙자한 욕망의 흔적들을 부쉈다. 추호도 의심치 않았고,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이상을 분리수거했다.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이 사라지고 난 뒤 텅 비어버린 그 공간도 버렸다. 몸에 묻은 물감 냄새도 지워 버렸다. 더불어 사치인 양하며 사랑도 영혼의 블랙홀로 그렇게 밀어 넣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것이 그녀와의 인연이 끝이 아니다. 먼 발치에서였지만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딸아이 갓 돌이 지나고 명절이 되어 고향을 찾았을 때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녀를 보았다. 본능처럼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장난치는 어린 아들들에게 여느 아낙처럼 잔소리를 곁들여 화를 내고 있었다. 옆에 후줄근한 점퍼 차림의 키 큰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다. 속이 상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아들 녀석 따귀를 후려치고 싶었다. 멀리서나마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인연은 그렇게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떠나보냈다. 혹시 그녀도 나를 보지는 않았을까? 아기를 안고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나와 같은 심정이었다면 달빛에 아른댔던 둘만의 추억은 어둠이 먹어 치웠다.
돌아오는 내내 역방향에 앉아 기억을 맞추느라 애썼다. 가까운 시간부터 파노라마로 역재생되었다. 결국 마지막이 된, 구태여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대구에서 도덕적 부채를 안겨버린 사연, 군대에서 휴가 나와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그녀 자취방을 찾아갔을 때, 추운 겨울밤 내 방에 앉아 솜이불에 다리만 덮은 채 마주 보며 소곤소곤 이야기 나누던 그때, 고등학교 시절 통기타 메고 올랐던 뒷동산에서 본 별자리 오리온, 내가 보낸 편지를 책가방에 두었다가 선생님께 들켜 교실에서 낭독 당하던 이야기, 그녀 친구들과 섞여 카드 놀이하던 시절이 뒤죽박죽되어 기억을 헤집는다. 경수, 말자, 화숙 그 계집아이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일방적으로 쏟아내고도 부족함이 있다는 듯 영상통화를 제안한다. 머리를 가로저어 거절했다. 허락도 없이 모습을 휴대전화기에 담는다. 본인 얼굴을 나와 가까이해 함께 담고서야 앵글을 거둔다. 재차 다가와 때마침 언니로부터 내일 온다는 전화가 왔다면서 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말로 오늘 상황을 필연인 양 엮는다.
예의라고 생각해 언니 전화번호를 물었다. “알려줘도 될까?”라면서 빠른 손놀림으로 내 강의 노트 귀퉁이를 찾아 적는다. 동글동글 언니 얼굴과 똑 닮은 익숙한 필체다. 언니가 어디 사냐고 물었다. 충북 어디라고 답한다. 그래서 그때 그 기차를 탔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초청 강의로 바쁘게 지낸다는 자랑으로 언니에 대해 마무리하고 돌아선다.
청춘에 새겼던 문신이 선명해지고 있다. 과거라는 나무에서 흩날리던 그리움의 낙엽이 향기로운 꽃잎이 되어 날린다. 기다렸을까?
동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사진을 보내달라며 답장을 보냈다. 내가 언니를 궁금해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전날 찍은 내 사진이 아니라 언니 사진을 보내왔다. 얼핏 본 후 화면을 닫았다. 잔상이 되어 따라다닌다. 자세하게 보든, 삭제하든 의미나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화면을 열었다. 깊은 눈매에 충만한 자신감이 반가웠지만, 우려했던 세월의 단호함이 선명하게 담겼다. 옛날 흔적을 찾기 위해 사진을 키우자 시간이란 서슬이 냉혹하게 확대됐다. 동생이 내 사진을 담아 갔으니 그녀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연락하지 않았다. 전화번호와 함께 순식간에 찾아온 인연도 버렸다. 첫사랑의 환상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돌이킬 수 없어서 필연적으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첫사랑이라는 마법이 주는 그리움을 현실에서 맛보았다. 그러나 무지개가 걸친 꽃밭을 지난 느낌이 아니다. 세월의 단호함이 뚫어 놓은 외줄기 동굴을 빠져나온 느낌이랄까. 결국 첫사랑에 대한 상상은 영혼이 확대된 볼록 렌즈라는 생각을 굳혔다. 낱장으로 다가온 추억은 짧은 현실이 되었다가 기억에 붉은 줄을 긋고 사라졌다.
늑대가 달을 사랑하듯 추억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잘못된 운명의 교집합으로 혼돈에 빠질 수 있다. 지나간 옛사랑은 그냥 남겨 두는 것, 물리적 힘을 동원해 순간접착제로 이어 붙인다면 서로에게 치유할 수 없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이별은 아무리 익숙해도 그때마다 아픈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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