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너 2
봄이 오고 여름이 온다. 날씨가 거의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내 가을이 눈 깜빡하는 새 지나가고 마침내 겨울이 다시 들이닥친다. 삶은 그냥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게 다시 한번 가능해진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아름답고 엄청난 모험까지도.
- 소설 위너 2 p521
2023년 12월에 출간된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님 소설 '위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문구이다. 총 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한 권당 500페이지가 넘는다. 글씨도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꽤 빼곡하다. 그렇기에 예상할 수 있다. 이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리라는 것이.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적힌 위의 문구가 어떤 의미를 뜻하는 것인지. 소설을 읽지 않아도 대략 짐작이 되지 않을까.
사실 나에게는 어제 꽤 의미 깊은 날이었다. 대학원 시절 나의 은사님께서 정년 퇴임식을 하시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실험실의 선후배들이 모두는 아니지만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을 함께 했다. 오랜만에 20년 전 과 교수님들도 뵐 수 있었던 자리였음에 나름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던 자리였다.
나의 실험실 생활은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원 입학 전, 학부생 시절부터 미리 실험실에 들어가 선배들의 실험을 도우며 실험을 배우던 시절이었기에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석사학위까지 받고 바로 졸업했지만, 선생님과 선후배와 실험실에서 함께 한 시절은 2년이 아니라 3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의 인생에서 가끔은 후회되기도 하고, 꽤 많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수능 성적에 맞춰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생각보다 전공 공부가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 자연스레 들어간 대학원 실험실. 하지만 밤낮없이, 주말도 없이 이어지는 실험과 졸업할 때쯤에는 쉼 없이 이어지는 서류 탈락. 그리고 10년 이상 전공 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나서 이제야 깨닫게 되는 나의 적성과 능력의 한계. 그래서 가끔 후회한다. 그 당시 대학원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지만 나의 그 시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어제 그 모임에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어제 모인 모든 선후배와 모든 추억을 가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앉은 그 테이블에 모인 선배, 후배들과의 추억이, 그 기억이 너무나 소중해서.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22살에서 26살까지의 그 기억을. 바쁜 일상을 살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모여서 누가 '우리 그때~'라고 말 한마디 던지면 다들 '아~그때'라고 쉴 새 없이 모두 공통된 기억을 다시 소환할 수 있는 그 시절의 그 기억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한동안 모임에 나가지 못해 5년 만에 만난 선배들인데도, 모두 평일에 힘들게 일하고 주말 아침부터 멀리에서 온 길인데도, 너무나 반갑다고 웃으며 맞이해 주는 선배들을 보면서 '아 나는 그 시절, 그 선택을 후회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는 게 직업이, 회사가 전부가 아니니까. 내가 비록 지금은 전공을 뒤로하고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지만 그래서 그 당시 선택에 따른 시간과 고난에 대한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 뒤편에 남은 내 소중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한 추억이 나에게는 남아 있으니, 나에게 그 시간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이번에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선생님께서(우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교수님이 아닌 항상 선생님으로 불리기를 원하셨기에 우리는 대학원 시절 내내 선생님으로 불렀다) 마지막 인사말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너희들을 남겼기에 사실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그러니 너희도 무슨 일이든 해라.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의 문구처럼 삶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선생님의 두 번째 인생에서도 무슨 일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이른 두 번째 인생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을 벌이는 것은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는 사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두 번째 인생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제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