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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릴때의 기억 1

무제

by 북곰

나의 특별한 어렸을 때 얘기를 하고 싶다. '특별한' 이라고 하니 무슨 비범한 모습을 보였거나, 아님 특별한 경험을 했던 아이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런건 아니다. 특이하다 한 것은 어렸을 때 모습들이 나와 비슷한 세대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윗세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이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써본다. 덧붙인다면 나의 기억도 계속 엷어져 가는지라 빨리 글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써본다.


나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어수선했던 시기에 인가가 많지않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기억 나는건 빛바랜 사진 1장을 본 기억 뿐이다. 100일 된 갓난둥이 하나가 장작더미 모듬 위, 파란색 포대 가운데에 덩그러니 누운 모습이 기억난다. 그 사진은 분실돼서 무척이나 서운하다.


집에 TV가 있었다. 열고닫는 서랍문이 브라운관 앞쪽에 있고, 옆에 스위치를 잡고 시계방향으로 돌려 나오는 단 하나의 방송을 보면 되는것이었다. 낮에는 방송을 안하기에 서랍문으로 닫혀있었다. 저녁 때 방송이 송출되는 시간이 되면 서랍을 양쪽 옆으로 열고 시청하였다. 집 뒤쪽 감나무에 안테나가 설치돼 있고 화면 조정이 안되면 주먹으로 티비를 치거나 집 뒤로 나가서 감나무에 걸쳐놓은 안테나를 여기저기 움직였다. 안에서 "텔레비 잘 나와!"하면 그 지점에 안테나를 조심스레 멈춰놓곤 했다. 내 기억으로 매번 안테나를 옮겼던 것 같다.


6시쯤, 하나뿐인 방송 kbs 1tv채널에서 보여주는 손오공 인형극을 봤다. 흑백으로 나오는 서유기 손오공이 주인공인 인형극이었는데, 이 인형극 보는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웠다. 희미한 기억속에 생각나는 장면은 손오공이 염소도사랑 도술 내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한마디 말도 없이 동생들과 보고 있던 그때가 아련한 기분이다. 어머니는 보통 저녁을 5시 30~40분쯤에 했다. 내가 이 시간대가 기억나는 이유는 집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항상 어머니가 '불쏘시개'를 해오라고 나에게 시켰기 때문이다. 6시.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인형극을 봐야 하는 나였기에, 어머니에게 자루 하나 받고 갈퀴를 들고 바로 뒷산으로 달려갔다. 뒷산에는 듬성듬성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고 그 밑에 잘 마른 솔잎이 떨어져 있었다. 이것을 부리나케 갈퀴로 긁어모아 자루 한짐을 만들고, 그 짐을 가슴에 안고(이때 항상 난 천하장사가 된 기분이었다.) 집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그때는 날씬했고, 다리에도 힘이 넘쳤다. 부엌에 자루 한짐을 놓고 안방으로 뛰어가, 맘 편안하게 인형극을 볼 수 있었다.


우리집은 아궁이가 있었다. 그리고 구들장이 있었다. 안방 바닥은 진흙에 울퉁불퉁한 큰 돌을 넣어 만든 평평하지 않은 집이었다. 어렸을 때는 상관없었는데 조금 큰 중학생이 되어서 집에서 자면 울퉁불퉁한 표면에 항상 몸 여기저기가 걸렸다. 나무를 태워서 집 바닥을 데우는 구들장은 열이 골고루 분산 되지 않고 아랫목은 돌에 검은 그을음이 생길정도로 뜨거웠다. 나는 아랫목 뜨거운 지점에서 잠을 못자고 조금이라도 서늘한 부분에서 자기 위해 문 입구쪽에서 잠을 잤던 것 같다. 방문을 열면 마루가 있고, 마당이 있었다. 한 겨울에 이불을 둘둘 말고 집밖 눈오는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어린나이임에도 몽글몽글 알 수없는 기분좋은 느낌이 오르는걸 느꼈다.


어렸을 때 나에게 마루는 정말 컸다. 몸을 이리저리 한참을 굴러도 내 몸전체보다 마루는 훨씬 크고 길었다. 물론 마당쪽으로 몸을 굴리면 떨어질 수 있는데, 그 느낌이 무척이나 무서웠다. '옛날 항해사들이 지구의 끝에 도달하면 끝도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과 비슷한것 같다. 처마 밑과 마루를 잇는 기둥이 있었는데 그 처마밑에 제비가 둥지를 지었다. 봄이면 둥지에서 새끼들이 청량하게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울음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도시에 살며 제비를 본 기억도 없다.


좁디 좁은 집이었다. 방 하나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를포함한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 여섯 식구가 한 방에서 잤다. 어렸음에도 넓지 않은 방이었는데 그 방 절반에는 어머니가 누에를 키웠다. 나무로 된 단을 쌓고, 그 쌓은 단마다 뽕잎을 잔뜩 덮었다. 누에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왜 누에를 키우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하얀 벌레가 더 하얀 고치가 되고 그 고치를 만질때 만져지는 실이 신기했다. 뽕잎을 따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때는 겁도 없고 뽕나무를 잘 탔다. 뽕나무에서 한짐 가득 뽕잎을 딴 후 '오얏'(오디가 표준어, 오얏은 어렸을 때 불렀던 명칭)이라고 부르는 열매를 먹었다. 검붉은색 오얏이 가장 달콤하고 즙도 풍부했다. 손과 입이 검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잘 익은 오얏이 없는 경우 빨간 오얏도 먹었다. 녹색을 옷처럼 두른 오얏은 먹을 수가 없고 어서 빨리 익기만을 기다렸다. 누에뿐만아니라 우리집은 참 부업을 많이 했다. 벌통2개로 꿀벌도 키우고, 닭장에서 닭도 키웠고, 외양간에 소한마리도 키웠다. 물론 개도 있었다. 동시에 키웠다면 어느정도 입에 풀칠 하는 집이라 생각하겠지만 동시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어머니는 머리카락도 팔고 했던것 같다. 참 그 옛날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이상한 뽀글파마를 했는데 유독 어머니만 한 것이 아닌 사진 속 다른 여성어른들도 한 거라 그 시대가 그러했나 생각이 든다.



풀을 잔뜩 베었던 적이 있다. 풀을 어떤 이유로 마당에 널어 두워는지 기억이 안난다. 다만 내가 낫으로 풀을 베고, 자루에 넣어서 마당에 풀을 널었다. 한데 마당에 널어둔 풀에서 뱀 한마리가 나왔다. 나는 너무 놀라 기겁했고, 할머니가 몽둥이를 가져와 뱀을 내리 쳤다. 몇대 맞고 뻗은 뱀을 막대기에 걸어 꽤 멀리 걸어가, 버렸던 기억이 난다. 글쓰면서 지금도 놀란 감정이 있다. 나는 풀만 벤 것이 아니고 뱀도 자루에 넣었고, 그걸 어떻게 들고 왔는지....


장난감을 너무나 가지고 싶었다. 나무를 깍아 만든 새총, 썰매를 정말 가지고 싶었다. 다른 또래 넘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새총으로 새 잡으러 다니고, 만들어준 썰매를 탔는데 나는 그런것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만들어달라고 했으면 아버지가 만들어줬을텐데,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감히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밤늦게 놀다가 썰매를 깜박한 친구를 봤다. 내가 그 썰매를 잘 숨기고 결국 훔쳤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양심에 무섭고 걸리면 어떻게될까, 타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결국 나마저도 숨겨놓은 썰매를 애써 생각하지 못했다. 놀지도 못하고 어린, 아주 어린아이가 죄책감을 갖게 됐던 별로의 결과 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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