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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진 Jul 01. 2024

8. 그리운 ‘바보 아빠’

구스타브 클림트, <너도밤나무 숲 1>

‘데미안 책 중간에 5만 원 넣어 놓았다. 여행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아버지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갈 때마다 몰래 용돈을 챙겨주셨다. 엄마한테 용돈을 더 받게 해 주려는 따뜻한 배려였다. 아버지는 영락없는 ‘딸 바보’였다.

등굣길 무거운 책가방이 안쓰러웠던 ‘바보 아빠’는 매일 아침 딸 책가방을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셨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합쳐서 9년 동안 내 손에 책가방이 들려진 날이 없었다. 

내게는 친구이고 보디가드이며 해결사였던 아버지는 패혈증이라는 ‘몹쓸 병’으로 갑자기 내 곁을 떠나갔다. 바보 아빠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못난 딸이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아버지는 내게 사랑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아버지와의 소소한 추억은 잔고 빵빵한 통장 부럽지 않다. 힘들 때마다 그 ‘통장’을 들여다보며 기운을 얻는다.

3년 만에 찾아간 아버지 묘지 올라가는 길에 ‘바보 아빠’는 딸이 행여 섭섭할까 봐 예전 책장 사이사이 용돈을 넣어 두었듯이 몰래 알밤들을 숨겨놓으셨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떨어진 잎사귀 사이로 탐스러운 밤송이들이 반짝인다. 아버지가 주신 귀한 알밤을 산짐승들과 사이좋게 나눠 먹으려 딱 한 줌만 가져왔다.


구스타브 클림트, <너도밤나무 숲 1>, 1902, 캔버스에 유채, 100.0x100.0cm, 드레스덴 알버티 눔 소장


가을 햇살로 붉게 물든 클림트의 <너도밤나무 숲 1>에는 내 아버지가 살고 있다. 비록 밤송이가 열리지 않는 너도밤나무 숲 그림이지만 어딘가에 아버지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빽빽한 나무줄기 사이로 햇살이 어룽대며 들어온다. 떨어진 잎들의 바스락대는 소리는 분명 아버지의 속삭임이다.  

그림을 떠나며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두어 번 친다. 그리고 맹세한다. ‘꼭 행복해 질게요. 그렇지 않으면 난, 아버지 딸이 아니에요.’ 가슴을 세게 친 건지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인지 심장이 뻐근해져 온다. 


    



<함께 듣는 곡>

윌리엄 볼콤, 우아한 유령 (W.Bolcom, Graceful Ghost Rag)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예니 에르펜베크 장편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신기하게  다음 날 해가 떴습니다. 내 세상은 멈추었지만 잔인하게도 낙엽이 지고 눈이 왔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더니 꽃도 피더군요. 

어느 날 내가 살던 아파트 8층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하얀 나비는 그 이후 교회에서 보이고, 아버지 성묘 길에도 어지럽게 날갯짓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따라간 운동회에서도 살포시 내 어깨에 한참 앉아있었습니다. 정 많은 울 아빠는 먼저 간 아비를 그리워하는 딸내미를 차마 놓고 갈 수 없어 나비로 내 곁에 남으셨나 봅니다. 한동안 보이던 나비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희미해져 갈 즈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볼콤 (William Elden Bolcom, 1938~ )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곡인 <우아한 유령>.

살아생전 춤추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는 아들의 사부곡입니다. 우아하지만 경쾌하게 춤을 추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 내며 슬픔을 달랜 듯합니다.


이제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립지만 슬프지는 않습니다. 

우아한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되어 내 곁에 머물렀던 아버지는 햇살 가득한  평화로운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계시겠지요. 


https://youtu.be/Ico2EmLXjj4?si=zwncJ_ThndSA1Q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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