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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피 Sep 09. 2023

'기운(氣運)'이요?

단어와 말


타국생활을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행히 이 말과는 반대로 내가 만난 한국사람 열 중 여덟은 좋은 사람이었다. 여행을 하며 얻은 가장 큰 보물은 사람의 가치와 존귀함에 대하여 얻은 인사이트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의 나는 물론 앞으로의 나의 삶에도 크게 영향을 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인도에 꽤 오랜 시간 지내면서 나를 괴롭게 했던, 열 중에 여덟에 속하지 못했던, 강렬했던 한국인도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고맙다. 이 잊을 수 없는 일화를 통해 되고자 하는 어른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델리에서 집을 구할 때였다. 집 계약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때까지 자신의 집에 머물러도 된다며 선행을 베푸신 분이 있었다. 아는 분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명상을 즐기며 스승을 찾고 있다고 하였고, 따님은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미안해서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흔쾌히 큰방을 내어 주시고 맛있는 음식을 해 주시니 나도 호의를 감사히 받았었다. 큰 무리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고 집을 구하면 나도 도움이 필요한 한국인들을 많이 섬겨야겠다는 내용의 일기를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의 따님이 많이 아팠다. 그런데 며칠간 지속되는 고열에도 왜 인지 병원에 가지 않는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나쁜 기운들 때문에 아픈 것이란다. 처음 들어보는 병의 원인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가족들의 결정이니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걱정도 되고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했다. 안 되겠다 싶어 내게 조금 남은 미역을 불려 미역국을 끓였다. 서툴러서 맛은 없겠지만 감사하고 미안한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달되길 바랐다.

그날 밤, 시끄럽게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따님이 엄마에게 서럽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왜 내가 화장실 머리카락을 다 치워야 하는데. 더러워 죽겠어 진짜!”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화장실을 더럽게 썼나? 아, 화장실 청소를 좀 더 신경 써야 했는데.’   

  

따님은 나 때문에 힘이 드는가 보다. 얼른 집을 구해야겠다. 내일은 온 집안 청소부터 좀 해야 할 것 같다. 여러 생각과 계획들이 밀려와 잠을 자려는데 도통 잠에 들질 않는다. 다음 날, 따님이 조금 괜찮아졌다는 반가운 소식에 모두 거실에 모였다.


“진짜 다행이에요. 빨리 나아지길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아프려니까 아팠지. 손님이 우리 집에 있으니까 가 정돈이 안 돼서 그런 걸 뭐. 그리고 요즘 집 구하러 다니면서 바퀴벌레며 쥐며 많이 봤다고 그랬잖아, 아마 네가 그 더러운 기운들을 몰고 오지 않았을까 싶어.”     

‘이게 무슨 말일까.’

친절한 말투인데 한 없이 날카롭고 아프다.     


그날 밤 ‘기운’에 대해 사전적 의미도 찾아보고 명상 관련한 책도 찾아보며 밤새 흐느꼈다.      

기운 : 1.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
         2.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다른 감각으로 느껴지는 현상
         3. 감기나 몸살 따위가 걸린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초기 증상

2번 의미인 것 같은데, 그때는 어려서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집이 금방 나타났고, 내 새 보금자리에서 바퀴벌레 무리를 보고 울음보가 터진 것은 이날의 서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기운’이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부족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어떤 단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심으로, 내가 쓰는 단어와 말에 향기가 나면 좋겠다.        


http://brunch.co.kr/@hyeppy/1    새 보금자리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준 바퀴벌레에 대한 이야기


사진 출처 : http://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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