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크리스마스트리

by tripall

첫 해외여행지는 필리핀 보라카이(Boracay)였다. 처음은 서툴고 낯설지만 그래서 더 흥분된다. 여행을 계획하고 여권을 만들고 환전하는 등 번잡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번잡함이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알게 되는데 여행에서 가장 설렐 때는 여행을 준비할 때이다. 특히 여행가방을 쌀 때. 아마도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생각하면서 앞으로 만날 낯선 것들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리라.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새롭게 보게 되는 경치는 어떨지, 그곳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을지 등등.

출발하는 날 공항에서 탑승권을 받기 위해 긴 줄에 서서 기다릴 때 정말 떠나는구나 실감하면서 흥분은 이어진다. 드디어 항공사 직원 앞에서 탑승수속을 밟을 때 긴장감은 고조되어 가슴이 두근거려 목소리도 하이톤이 된다. 출국수속까지 끝내고 면세점 구경도 마치고 나면 비행기 탑승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고 오히려 가슴 두근거림은 조금씩 가라앉는다. 물론 첫 여행에서는 면세점이며 공항시설이며 건물 밖으로 보이는 비행기들 구경하느라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이어서 김포국제공항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보라카이로 가는 직항이 있는데 그때는 마닐라를 경유해가야 했다. 1992년 12월, 마닐라 국제공항에서의 첫 느낌은 후덥지근한 공기였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비행기를 타고 온 것 같은. 저녁시간에 도착했는데도 열기가 남아 있어 더운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마닐라 관광은 그리 기억할만한 것이 없었고 생소했던 건 크리스마스트리였다. 한 상가 건물에 들어갔는데 입구에 큰 트리를 설치해 놓았다. 그걸 본 순간 ‘왜 트리가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한여름인데. 날짜를 확인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하기까지 필리핀과 한 시간의 시차가 있는 것만큼 뜸이 들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면 흰 눈이 와야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한다. 두툼한 옷과 장갑, 털모자, 눈사람, 이런 것들이 크리스마스의 배경으로 떠오르는데 더운 날씨에 짧은 소매 옷차림을 하고 보는 크리스마스트리는 크리스마스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했다. 모든 나라가 사계절이 있는 게 아니라는 자연현상을 배워서 알고 있으면서도 보아온 것들로 형성된 의식이 다른 배경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닐라에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칼리보 공항으로 갔다. 공항이라기보다는 터미널 수준도 되지 못하는 시설이었다. 공항이라면 보통 세련된 이미지였는데 그런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비행기에 내려 뙤약볕에 걸어서 이동하고, 짐은 일하는 사람들이 일일이 꺼내어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버스로 칼리보 공항에서 항구까지 이동해 거기서 큰 배를 타고 가다가 수심 때문에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탔고 드디어 보라카이에 도착했다. 선착장까지 걸어가도록 해놓은 시설이 없어서 해변까지 가려면 작은 배에서 내려 물속을 걸어야 했다. 도와주는 현지인의 손을 잡고 바닷물로 내려서려는데, 물이 너무 맑은 것이다. 샌들 신은 발을 담그면 물이 더러워질 것 같아 잠깐 망설이게 되었다. 그렇게 보라카이 바다는 내게 각인되었다. 모래가 아니라 산호 가루로 된 백사장이라 산호의 흰빛에 더 맑게 보였을 것이다.

보라카이의 숙소는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방갈로였다. 나무 틈 사이로 안을 볼 수가 있어 숙소의 기능으로 부족하겠지만 그것 또한 색다르고 이국적이었다. 지금도 그런 곳이면 끌리는 게 첫 번의 기억이 좋아서일 것이다. 옆 방갈로에는 나이 든 백인 아저씨가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방갈로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나도 바닷가에서 글을 쓰면서 몇 달간 머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러고 싶지만 글을 쓰겠다는 건 빼야 하겠다. 바닷가에서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차분히 글을 쓸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밤 바닷가의 분위기도 멋졌다. 바닷가 바에서 긴 의자에 기대앉아 칵테일을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모래밭 무대에서 기타 치며 따갈로그어로 노래하는 소리에 파도 소리가 화음을 맞춰 자장가처럼 들리는 평온한 밤이었다.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밤을 나만 즐기고 있다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지금은 보라카이 해변에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고 들었는데 그때의 멋이 사라졌을 게 아쉽다.

스노클링이란 것도 처음 해봤다. 보트를 타고 깊은 바다로 갔다. 수영을 잘 못 하고 물에 뜨는 정도인데 구명조끼도 없었다. 겁나서 날개처럼 달린 보트 다리를 붙잡고 보트 근처에서만 스노클링을 했는데도 물속 구경에 신이 났다. 색이 화려한 물고기들과 산호초를 보느라 지루할 새가 없었다. 물속에도 산이 있고 마을이 있고 가족이 있었다.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바닷가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해산물을 먹어봐야 한다. 식사를 주문한 지 한 시간쯤 지나서 나온 음식은 미지근했다. 우리는 바로 요리한 따끈한 음식을 내놓는데 여긴 일부러 식혀서 내온 것 같았다. 우리나라였으면 벌써 몇 번이고 재촉했을 텐데 아름다운 바닷가이고 동행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있어 늦게 나온 음식에 식은 음식이어도 이해하는 넉넉한 마음이었다.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니 처음 하는 경험들이 많을 수밖에. 그 색다른 점들과 마주치는 게 신선하고 좋았다. 간접 경험은 한계가 있다. 책이나 영상으로 본 것은 직접 경험하면서 느낀 것과 같을 수 없다. 아주 사소한 것이 충격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는데, 또한 그것은 개인별로 충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여행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와도 일치하지 않는 나만의 경험이고 인식이다. 그 친구의 보라카이와 나의 보라카이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빈둥거리던 옆 방갈로의 백인 아저씨를 보고 ‘나이 들어 왜 저러고 살아’ 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외국에서 살아보는 꿈을 꾸기 시작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낯선 세계로 떠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일이 그동안의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씩 깨뜨리고 있었다. 내 주변에 규정되어 있던 틀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다름에 대한 이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맛에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떠날 것을 꿈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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