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호수에 담근 발

by tripall

일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한 달간 여행 준비를 하고 2017년 4월에 페루로 떠났다. 남미를 좋아하긴 했어도 페루를 또 갈 거란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언니가 혼자 거기에서 지내고 있었고, 외국에서 같이 지내는 경험도 해보고 싶었다. 언니 집에서 쉬다가 여행할 계획이었다.

남미가 우리나라에서 가기에 가장 먼 곳 같다. 게다가 언니가 사는 곳은 페루의 거의 남쪽 끝에 있는 모께구아(Moquegua)여서 길에서 48시간을 보내고 언니 집에 도착했다. 모께구아는 해발 1,400미터에 위치한 사막지역이다. 주변 산은 벌거벗은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흙먼지와 차 매연으로 공기는 좋지 않았는데도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부시며 강했다.

언니 집은 건물 3층에 있었고 아래는 집주인이 살고 있었다. 외부에서 3층으로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드나들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주인이 앙칼지게 짖어대는 개를 키우고 있어서 내가 나갈 때는 개를 안고 들어가 있도록 부탁해야 했다. 언니는 혼자 지내기에 이런 집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고도와 시차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몸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멍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저녁때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 지역에는 거리에도 풀어놓은 개들이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언니가 활동하고 만나는 일정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점차 그곳에 적응해 나갔다.


언니네 도착한 지 1주일이 지나 모께구아와 아레끼빠(Arequipa)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열두 명이 두 대의 지프차로 3박 4일간 캐니언 투어를 시작했다. 각 차의 운전기사는 가이드 역할도 했다. 우리 차를 운전한 훌리오는 자상하고 친절했다. 다른 차의 띠또는 다혈질적인 느낌이었고 우리랑 하는 투어를 일이라기보다 여행으로 즐기는 것 같았다.

첫날은 아레끼빠를 출발하여 포도주 농장과 공룡 유적지, 선인장 군락지를 들렸다가 추끼밤바(Chuquibamba)에서 숙박했다. 낮에 방문했던 곳들은 꽤 더웠는데 이곳은 3천 미터 가까이 되는 곳이라 추웠다.

다음 날은 더 높은 곳으로 갔다. 고도 때문에 어지러워 몇 명은 선뜻 언덕을 오르지 못했다. 고도가 4천 미터에서 5천 미터 사이에 자라는 이끼 같이 생긴 야레따가 여기저기 돌을 덮고 있었다. 눈 덮인 언덕을 오르니 더 높은 설산을 배경으로 한 호수가 있었다. 분화구가 호수가 된 것 같았다. 눈과 호수에 반사되는 햇빛이 눈부셨다. 아름다운 자연에 어울리게 띠또는 거기서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호수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해보고 싶었다. 띠또가 하지 않았다면 설산에 있는 호수에 발을 담근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시 물이 찼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건 아니었지만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은 좋다.

삶이 그렇듯이 여행에도 인연이란 게 있다. 여행할 곳은 내가 의도적으로 정했다 해도 그 길 위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 추억으로 남을지는 내가 조정할 수 없다. 여행 중에 만난 숱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가능성을 인연이란 말 말고 뭐라 할 수 있을까. 페루에 다시 온 것이 나의 선택이긴 했지만 그 선택을 용이하게 하도록 흘러간 상황이 있었고 거기에 내 의지가 반영된 건 없었다.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꼬불꼬불한 길을 몇 시간 달려 그 설산으로 갔고 호수에 발을 담갔을까? 그 순간은 나의 선택과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진행됐을 다른 요인들이 이뤄낸 합작품이다. 모든 순간순간이 여러 기운이 합쳐져서 일어난다. 그 순간을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고 깨달음의 찰나일 수도 있다. 거기서 뭘 얻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 중 많은 경우는 그렇게 과거로 끝나버리고, 몇몇은 인연을 조금 더 이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현재까지 연결되기도 하고, 미래로 회귀하는 인연도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은 상호적이어서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영향이 적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렇게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은 인간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호흡하는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몸 안팎에서 많은 생명체가 함께 작동하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아주 싫다 해도 그 사람과 공기를 서로 나눌 수밖에 없다.


설산에서 내려와 시피아 폭포를 보고 루이초에서 온천을 한 후 코타우아시 캐니언(Cotahuasi Canyon)의 한 숙소에서 묵었다. 우리가 다녔던 이 지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깊은 협곡으로 그랜드 캐니언 보다 두 배 이상 깊다고 한다.

세 번째 날은 안다구아(Andagua)로 가서 분화구에 올라갔었고, 와리문명 유적지에 갔다가 그 지역에서 잤다. 마지막 날 아침에 식당주인이 빌려주는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아레끼빠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뒷좌석에 뒤를 보고 눕다시피 앉아 그동안 보아온 전경들이 멀어지는 걸 보며 아쉬웠다. 덜컹거리며 4천 미터 이상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무너진 길을 메워가며 가고, 물웅덩이를 지나가야만 했던 이런 투어를 앞으로는 쉽게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언니 집이 중심이 되어 주변 도시도 다녀오고 칠레를 2주 정도 여행했다. 기점이 되는 곳에 집이 있다는 게 좋긴 하다. 그런데 내 집처럼 편한 것은 아니다. 두 달간 언니네 있는 동안 언니가 중심인 인간관계에 내가 조연인 삶을 지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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