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돈도 외국어도 떠나지 못할 이유는 아닙니다

나가는 글

by tripall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게 1989년이다. 해외여행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가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자유가 얽매여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의 청년기를 보냈다. 첫 해외여행을 떠난 건 20대의 끝자락인 1992년 겨울이었다. 그 이후 함께 또는 혼자, 짧게는 며칠 길게는 1년을 여행했다.

여행하면서 일기를 썼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어서 기록을 남기고 싶기도 했고, 저녁식사 후에 할 일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다. 특히 혼자 여행할 때는 밤문화를 즐기는 게 위험할 수 있어서 숙소에서 씻고 나면 다음 날 어디로 갈 건지 계획을 세우는 것 말고는 별로 할 게 없었다. 쓰다가 졸리면 다음 날 마무리 짓기도 하면서 거의 빠뜨리는 날 없이 일기를 썼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30개가 넘는 나라들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지만 기억에 남는 일들은 순간순간이어서 앞뒤가 생각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기억의 조각들을 연결시켜 글을 쓰려니 일기를 읽고 메모한 것들과 남겨놓은 자료와 사진들을 찾아봐야 했다. 그 일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여행할 당시의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여행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우지 않는다. 게을러서 그렇기도 하지만 찾아온 정보가 현지에서 일치하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그걸 선택하는 게 좋았던 경우가 많았다. 숙소도 예약하지 않는 편이다. 예약을 하면 그 날짜에 그곳을 가야만 하고 예상외로 그 숙소의 위치가 좋지 않거나 찾아가기 힘든 경우도 있어서 현지에 도착해서 직접 보고 확인해가며 숙소를 선택하는 것을 선호한다. 여행계획을 철저히 세워야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여러 전제조건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조건을 해결하려면 떠나기가 힘들어진다. 돈이 문제라면 저렴한 곳으로 여행하면 된다. 현지 언어를 할 수 있다면 여행이 더욱 재미있겠지만 언어가 안 돼도 여행하는데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만난 17세의 일본 남자는 1년 넘게 여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중국어도 영어도 거의 못 했다. 필요한 표현 몇 개만 준비한다면 여행이 더 수월해질 거다. 요즘은 휴대폰의 번역기능을 활용할 수도 있고, 한국어를 말하는 현지인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나이가 걱정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젊은 때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미루면 더 나이 들고 떠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방향 감각이 둔하고 길찾기도 못 하는 나이지만 한 번도 여행을 떠나서 집에 돌아오지 못한 적이 없다. 오히려 길을 묻고 다니느라 현지인들과 대화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준비되면 그냥 떠나라! 여행을 통해 20대에 경험하고 느끼는 것과 30대, 40대의 느낌과는 같을 수가 없다. 해볼 수 있는 것도 같지 않다. 여행으로 그 이후의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그 삶은 더 자유로울 것이다.

여행의 기억들이 단편적이었다 해도 여행에서 얻게 된 것은 꽤 컸다. 여행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했고, 지금의 삶을 선택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보면 컸다는 정도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여행이 내게 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낯설고 다른 것들이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함께 살아갈 대상들이다. 이 세상은 경쟁과 돈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여행하면서 ‘나’와도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가볍게 배낭을 싸서 낯선 곳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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