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의 기억

by tripall

30년간 배낭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으나 대부분의 기억은 조각조각 남아 있다. 그것들은 본 것으로만 기억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소리로, 냄새로, 맛으로 남아 있어 눈으로 기억한 것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다. 오감 모두 기억과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후각은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그에 동반하는 기억과 감정까지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감각기관이어서 오감 가운데 기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인도에서 돌아와서 한동안 짜이의 냄새가 코에서 맴돌았다. 홍차에 우유를 타서 짜이처럼 만들어 보았지만 그런 향이 나지 않았다. 갠지스강가에서 지나가는 상인에게서 사 먹은 짜이는 토기로 된 조그만 컵에 담아서 주었다. 적은 양이어도 이른 아침의 찬 기운을 녹여주었다. 마시고 난 컵은 버려졌는데, 부셔서 다시 컵으로 만들어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위생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플라스틱이나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아 환경친화적이었다. 짜이의 맛도 좋지만 향에서 느껴지는 푸근함이 좋았다. 2022년 11월에 네팔에 출장 갈 일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는 식당에 밀크티가 있어서 반가웠다. 진한 맛이어서 좋긴 했으나 인도의 추억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라 비슷한 맛이리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건지, 인도에 다녀간 지 거의 30년이 되어서 기억이 지워진 건지 모르겠다. 인도에 다시 간다면 짜이 향을 금세 구분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장담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오스의 한 숙소에서 맡은 바나나 빵의 달짝지근한 냄새는 행복감을 주었다. 라오스에서는 거의 맡아본 적이 없었던 냄새였다. 어디서 냄새가 나오는지 찾게 했고, 옆집에 빵이 나와 있는 것이 보여 결국 사러 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베이커리가 아니었고 구멍가게 같은 데였다. 빵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내가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아마도 후각과 관련되어서일 것 같다.


소리의 기억도 내겐 오래 가는 편이다. 아르헨티나 남쪽 파타고니아 지방에 빙하국립공원(Parque Nacional Los Glaciares)에 갔을 때, 큰 산을 이루고 있는 빙하를 보았고 빙하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모든 게 공허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울렸다. 빙하 산을 등반하고 빙하를 깨서 넣은 위스키를 마신 것보다 그 소리의 잔상이 더 남았다.

그 소리처럼 명상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은 소리를 제주에서 들었다. 현지인이 데려다준 오름이어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서귀포 쪽에 있는 오름이었다. 혼자 오름을 올랐고 마주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나무숲 사이에서 바람이 부는 소리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소리를 즐겼다.


모든 새로움을 접하게 될 때 대부분 시각을 통한다. 다른 감각기관들에 비해 가장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많은 정보를 접하기에 감정적으로는 더 둔한 것 같다. 그래서 웬만히 새로운 것은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점점 더 강한 것,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것에나 감정이 움직이게 된다. 노을 보는 걸 좋아하고 많은 곳에서 멋진 노을을 봤으나 특별히 어떤 장소가 기억나진 않는다. 비슷한 수준의 아름다움이어서 그럴 것이다.

반면에 코스타리카에서 본 화산이 분출하는 장관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라포르투나(La Fortuna)에 있는 아레날 산은 활화산이다. 2003년 4월 25일 밤, 운 좋게 산꼭대기에서 붉은 불꽃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더 잘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산 가까이 갔다. 용암이 흘러내리는데 붉은 덩어리가 툭툭 튀면서 떨어지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화산 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작업하는 공장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놀라운 자연현상이 벌어지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게 흥분됐다. 다음 날 낮에 버스로 다시 아레날 화산 근처를 지날 때는 화산재가 연기처럼 분출되는 것을 보았다.


맛있게 먹었던 것은 너무나 많다. 커피를 끊었는데 다시 먹게 만든 콜롬비아의 커피, 라오스에서 점심 먹고 나선 거의 매번 먹었던 타피오카로 만든 디저트, 인도네시아에서 자주 먹던 아보카도 주스, 케냐에서 먹은 망고, 태국 피자헛에서 먹은 해물이 잔뜩 들어있던 피자,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먹어본 랍스터, 일본인들이 새해에 먹는 떡국. 식욕이 좋고 음식을 맛있게 먹는 편이어서 미각에 대한 기억을 따로 꼽아내기가 더 힘들다.


촉각은 손으로 만진 것보다는 몸으로 느낀 것으로 말하면 어드벤처 투어를 했던 게 떠오른다. 콜롬비아 산힐(San Gil)에서 여러 레포츠를 저렴한 가격에 할 수 있는데 그중에 동굴 투어를 신청했다. 동굴 입구까지 집라인(Zipline)을 타고 내려가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투어의 마무리는 2미터 정도 높이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려야 했다. 이전에 다이빙하다 물에 닿을 때 엄청 아팠던 기억이 있어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모두 먼저 보내고도 망설여졌다. 다른 출구가 없다고 했다. 기다리던 가이드는 자기가 안고 뛰어내리겠다고 하는데 물에 부딪히는 것 말고도 사람끼리 다칠 수 있어 결국 혼자 뛰어내렸다.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한동안 고통은 남았지만 그 동굴 투어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줄을 조정하며 내려오는 압세일링(Abseiling)이란 걸 해봤다. 나이스나(Knysna)에 기차가 다니는 다리에서 연습했는데 처음 세 번은 몸 앞에 줄을 걸고 내려오고, 다음엔 뒤에 줄을 걸어 팔을 벌려 날 듯이 내려갔다. 멈추고 내려가는 걸 내가 줄로 조정할 수 있어서 안전했다. 마지막은 다리 기둥을 디뎌 발로 반동을 주며 내려갔다. 그러곤 산으로 이동해서 암벽에서 내려오는 걸 두 번 했다. 내려오는 길이가 길어서 팔이 많이 아팠고 바위에 부딪혀 몇 군데 멍이 들었어도 아주 재미있었다.


오감 이외에도 감정적으로 기억되는 것도 있다. 그건 사람들에게서 온다. 대가 없이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있어 낯선 곳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을 알기도 하고 모른 채 헤어지기도 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좋은 기억만 있던 건 아니다. 그런데 내겐 좋은 기억들이 훨씬 많다. 기분 나빴던 기억조차 단순히 그것이 나쁜 경험이었다고 말해버리기엔 때론 그 일이 교훈이 되기도 하고 얘깃거리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한다. 예상치 않은 일들과 부대끼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여행의 재미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를 바라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잊혔다고 생각했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다시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사라졌다고 여겼던 기억들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내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안다. 30년 전 배낭여행을 시작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앞으로 할 여행에서는 무엇을 느끼고 또 어떤 변화를 할지 기대된다.

빙하.jpg 아르헨티나 빙하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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