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내리는창가 Aug 18. 2023

거장의 손길이 닿은 신의 명작

떠나볼까요, 아이슬란드? - 여행 6일 차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유럽에서 가장 큰 폭포인 데티포스이다. 데티포스는 폭포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서 조망을 할 수 있는데 대체로 폭포의 전체적인 모습이 더 잘 보이는 서쪽 전망대가 인기가 많다. 그러나 늘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으니 바로 영화 ‘프로메테우스’이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에일리언의 프리퀄로 만든 프로메테우스 첫 장면이 바로 이 데티포스의 동편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였다면 크게 고민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설치했을 테니까. 그러나 여긴 아이슬란드. 자연경관을 해치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다리를 설치할 리 만무했고, 그 결과 동쪽 전망대에서 서쪽 전망대까지 가려면 약 63km의 거리를 차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달려가야 한다. 그럼 우리의 선택은 과연 동쪽이었을까, 서쪽이었을까?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얼마나 어렵게 갔는데 이 멋진 풍광을 포기한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스트두라길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이다. 거기서도 협곡 양쪽을 오가는데 거리가 꽤 멀었고, 계획에 없던 트레킹을 했으며 넋 놓고 감상까지 했으니 말이다. 일단 출발을 하고 차에서 조카들이랑 이야기를 했다. 계획대로 두 곳 다 갈지, 아님 한 곳을 포기할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몇 번 말이 왔다 갔다 했는데, 그러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두 곳 다 들르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긴 했지만 9월의 아이슬란드는 아직 해가 길어 저녁 늦게까지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피곤함은 차후의 문제이니까. 

결정을 그렇게 하고 데티포스 동쪽 전망대로 가기 위해 864번 국도로 접어드니 길은 다시 비포장 도로이다. 이곳은 길이 위험하지는 않아서 f로드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도로 상태는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다녀온 길 중 최악이었다. 비포장 도로 대부분이 웅덩이가 움푹움푹 팬 엠보싱 화장지 같은 도로였지만 이곳은 특히나 상태가 심각했다. 거의 전구간이 울퉁불퉁했고 깊이도 상당해서 자동차의 완충장치가 다 박살 나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진동이 너무 심해 온몸에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 데다  조금만 방심하면 핸들이 겉돌아 핸들을 잡은 손에도 힘을 잔뜩 주고 운전하다 보니 체력소모도 상당했다. 

그런데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너무 인상 깊었다. 대부분의 구간이 키 작은 풀들만 자라는 관목지대이거나 자갈만 펼쳐져 있는 황무지였는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엄한 대자연의 풍광은 경이로웠다. 사실 달리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지만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무한한 대지는 대자연의 서사를 들려주는 것 같은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아이슬란드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데티포스 동편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매불망 고대하던 화장실이 드디어 있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온 후 처음 본 화장실. 물론 유료 화장실이 하나 있긴 했었지만. 자연보호도 좋지만 그래도 화장실 문제는 아이슬란드 정부에서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인 것 같다.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볼 시간이다. 주차장에서 몇 분을 걸어 내려가면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협곡이 나타나고 협곡이 보이는 순간 왼편으로 거대한 데티포스가 바로 보인다. 

이런! 또다시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왔다. 압도적이었다. 신의 손길이 닿은 명작이 거기 있었다. 감동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내 온정신을 앗아가 버렸다. 물멍의 시간이다. 이런 대자연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인생을 생각하게 되고 사람이 갑자기 철학적으로 변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나도 대자연 앞에서 내 인생을 성찰하고 있었는데 상당한 고통이 뒤따르고 있었다. 폭포가 너무나 거세게 물줄기를 토해내고 있는 탓에 튀어 오른 물안개로 주변은 마치 비가 내린 것처럼 온통 흠뻑 젖어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 온몸이 젖어버리자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뒤돌아 나오는데 벼랑 끝에 앉아 하염없이 폭포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과거의 아픈 시간을 떠올리며 회한에 빠져 있던 걸까, 폭포의 힘을 빌어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있던 걸까! 어느 쪽이든 마음을 치유하고 되돌아갔기를 바란다. 

이제 데티포스의 서쪽으로 갈 차례이다. 스투드라길 협곡을 가기 위해 갔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링로드에 접어들어 가다 보면 북쪽으로 864번 국도로 빠지는 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다 보면 북쪽으로 862번 국도로 빠지는 길이 나오는데 864번 국도는 데티포스 동쪽, 862번 국도는 데티포스 서쪽으로 가는 길이다. 다만 동쪽 전망대에서 서쪽 전망대로 가는 길은 864번 국도를 다시 내려와서 링로드인 1번 국도로 간 후 862번 국도를 타는 것이 아니고, 동쪽 전망대에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서 85번 국도를 탄 다음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862번 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길로 가는 것이 조금 더 가깝다. 쉽게 말하면 아래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데티포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우리가 둘 중 하나만 보기로 결정했다면 가지 않았을 길이다. 데티포스 동쪽 전망대를 나와서 서쪽으로 가기 위해 우리의 선택으로 가게 된 그 길로 접어들었다.                

데티포스가 흐르는 강이 꽤 깊은 협곡인 데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걸로 봐서 이곳은 상당히 높은 고원지대인 듯했다. 키 작은 관목들이 펼쳐져 있는데 가을이다 보니 울긋불긋 색이 고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거대하고 웅장한 행성의 표면을 보는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운전하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카가 소리쳤다. 여우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일단 급정거를 했다. 그러고 조카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다. 여우가 맞냐고. 난 멀리 펼쳐진 풍경만 봐서 보지 못했는데 길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길 위에 차라고는 우리밖에 없어서 차를 어느 정도 후진을 하니 뒤를 돌아보던 조카가 저기 있다 하는 것이다. 일단 차를 세우고 내렸다. 난 내려서도 여우를 볼 수 없었는데 여우도 우리 인기척을 느끼고는 바위 뒤에 숨었던 것이었다. 조카가 가리키는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니 정말 바위 뒤에 여우가 있었다. 

세상에나, 야생 여우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우리를 본 여우는 일단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도망을 가려고 했지만 그다지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 마치 자신은 우리에게 전혀 겁먹지 않은 것처럼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여우의 걸음걸이는 정말 놀라웠다. 애니메이션 같은 것에서 보면 여우의 걸음걸이를 묘사할 때 사뿐사뿐 발을 내딛으며 총총총 걷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가 된다. 그런데 이 녀석 정말 만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총총총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만화에서 보던 그 여우가 충실한 현실 고증이었다니. 여우의  걸음걸이를 보고 느낀 감정은 우리가 명작을 실제로 접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그 벅찬 느낌과 같았다. 감동스러웠다. 여우는 곧 사라졌다. 하지만 이건 이번 여행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이다. 다른 것들이야 보기로 작정하고 찾아간 것들이지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수확이니까. 그때부터 우리의 눈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여우는 없는지, 아니면 다른 신기한 동물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 살피느라. 그 후로 더 이상 야생동물과의 우연한 만남은 없었지만 여우를 본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데티포스를 한쪽에서만 볼지 양쪽 다 볼지 고민하다 내린 순간의 선택, 여우를 본 건 모두 그 순간의 선택 덕분이다. 

이전 17화 주상절리, 어디까지 가봤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