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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돌 Feb 18. 2024

내 손에 칼을 들고 있을 줄이야...

나도 꿈이 있었을 텐데... 그 꿈은 뭐였을까?

달그락달그락...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와중에, 

취익취익~ 가스레인지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압력밥솥 소리도 저 편에서 들려온다.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준비

중에 있다. 남편을 포함한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시간이 유일하다.

다들 회사, 학교 등 각자의 업무를 야근 없이 제때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7시 정도.

회사원이나 학생들 대부분 아침 7시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준비 시간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저녁 6시면 개인에게 주어진 하루 업무의 몫은 마무리되는 편이다. 


하루 주어진 몫이 제대로 처리가 되든, 아니면 내일로 미뤄지든 그건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건 본인들이 처리해야 할 몫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부분이기에.


가족들이 돌아오는 시간부터가 나에겐 야근 시간인 셈이다.

그들이 아침 7시부터 일과가 시작된다면, 난 그 보다 항상 한두 시간 일찍 근무를 시작해야 한다.

아침 식사, 옷, 씻는 것 등 그들이 직장이라는, 학교라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한 맞춤형 갑옷과 전투에 승리하기

위한 든든한 식량을 준비해 주기 위해서 그 시간에 눈을 떠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곧이곧대로 나의 노고에 대해 취하해 주는 편은 아니다.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 '늦잠을 자서...', '속이 안 좋아서...'라는 다양한 이유로 잘 차려진 밥상을 외면하고

나가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어쩔 수 없다. 한두 번 겪은 일상은 아니기에...

그렇다고 아침에 전장을 나가는 장수들의 기를 꺾을 필요는 없기에 잔소리 신공은 이제 내뿜지 않는다.

그냥 나도 모르게 얼굴과 말투에 속상함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고, 그들이 이런 마음을 알아서 다음 날에는 

고쳐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장수들을 다 출격시킨 후, 이 공간은 다시 8시간 정도는 정적이 감도는 나만의 평화로운 공간이 된다.

아무도 없다. 누구 하나 말을 걸지도 않는 그런 조용한 공간.

간혹 TV소리가 들릴 뿐, 누구 하나 나를 찾아주는 이는 점점 줄어들어간다.


평소 일과대로 일주일에 한 번 센터에 가서 수영을 배우러 나간다. 그러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돌아와 잠시 쉬고 나면 벌써 오전에 나갔던 장수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 간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오는 장수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또다시 나만의 전쟁터로 가서 칼을 집어든다.

오늘은 어떤 메뉴를 해줘야 되나...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 중 하나다.

(보통 직장인들은 점심때, 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메뉴 선택이 고민이라고 하던데... 난 내가 먹고 싶은 

메뉴 선택에 대한 고민인 아닌 각기 입맛이 다른 장수들의 메뉴 고민이기에 더 힘든 것 같다)


저녁 또한, 열심히 준비하고 있노라면,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

"엄마! 오늘 친구들이랑 좀 놀다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저녁 먹고 갈게요."

첫째 여자 장수에게 걸려온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칼을 집어 들고 준비를 하던 중... 10분 여가 지났을까? 또다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여보! 저녁은 먹고 들어갈게. 갑자기 회식이 잡혀서... 애들이랑 먼저 먹어요!"

'음... 갑자기 잡힌 회식이라니... 오늘 전쟁은 승리했나 보군... 승전보를 울리는 날이니 머라 할 수도 없고...'

'그런데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이제야 회식이 잡혔다고? 오늘 전투가 치열했었나?'

라는 생각을 하며 참고 넘긴다. 칼을 든 손은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젊은 남자장수 두 명이 더 남아있기에 준비는 계속 이어갔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제때 오겠다 싶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승전보도 비보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설마 전사한 건 아니겠지?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왔다.

식사 준비는 말끔히 마친 상태였지만... 연락이 없었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준비해 두었던 저녁 식량은 손수 다시 치웠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젊은 남자 장수 두 명이 함께 복귀했다.

이 녀석들이야말로 전장에서 승장인지 패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얼큰하게 취해 있는 상태였다.

"원데! 왜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었노?"

"아! 오늘 관돌(가명)이가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내한테 아까 갑자기 연락이 와서 술 한잔 하자고 해서..."

"난 엄마한테 연락드린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완전 취해서 상태가 저렇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해 완전히 뻗어버린 장수들에게 어떤 말을 한다 해도 귀에 들리지도 않을 것이고...

내 입만 아플 뿐이다.

"그래 일단 자라. 그래도 엄마 저녁 준비하는 거 알면 미리 연락도 좀 해줘야지! 그래야 나도 다음 준비를

하지! 앞으로 미리 연락 좀 해라!"

"네. 죄송해요."

그렇게 하루는 마무리되었다.


이제 이 세상에 발을 디딘지도 55년이 지나간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난 뭘 하면서 지내왔을까?'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많이 드는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자식들도 다 크고, 남편도 든든한 직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기에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는 이렇게 사는 게 대한민국 여자들의 당연한 삶이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이런 시대였으니까.

그래도 한 명 있는 딸내미는 나처럼 자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고, 사회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키우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 또한 '애기 아가씨'로 불릴 만큼 돈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시절에는 하인도 있었기에, 내 옆에는 항상 2~3명의 하인들이 붙어서 나를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때를 회상한다면, 현재의 내 모습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삶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다만 가끔씩... 

'난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뭐였지?'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많이 들어 내 얘기를 한 번 정리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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