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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화랑 Oct 14. 2024

체육 만년 꼴찌인 우울증 환자가 런닝을 계속 하는 이유

치료 목적 따위 없다, 그저 1초의 풀냄새를 위해

뛰라고 그 누가 시킨 적 없다. 아, 물론 4박 5일 집단 상담 캠프에서 매일 새벽에 1시간 반 씩 뛰도록 시켰다. 하지만 4박 5일의 마법이 풀려난 건 오래 전. 더욱이 매일 출퇴근을 지루하게 반복하는 서른 살의 직장인은 웬만한 자기 의지 없이 밖에 나가 뛰지 않는단 말이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살을 빼기 위해서? 건강해지기 위해서? 그 무엇도 내 런닝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건 나도 신기한 내 변태같은 마음가짐의 기록. 초보 달리기 주자의 이야기.     


최근 집 앞 공원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적게는 30분부터 많게는 1시간까지 뛰다 온다. 쉼 없이 달리는 건 아니다. 나만의 기준이 있다. 다리 하나를 건너면 다음 사람이 개를 데리고 나를 스쳐갈 때까지 걸어가기.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지나치면 다시 다음 다리 아래로 쏙 들어갈 때까지 뛰기. 그렇게 다리를 열 개 남짓 헥헥거리며 매섭게 째려본다.

[이번 다리만 지나면 꼭 길게 걸어야지.],
 [다음 다리에서는 꼭 멈추고 물을 먹어야지.] 


이윽고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더 멀리 있을 것만 같던 도착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지면, 나는 길게 걷겠다고 언제 다짐했냐는 듯 10초 가량 짧게 걷고는 바로 뛸 채비를 한다. 그리고는 뛰자마자 후회한다. 

[아, 진짜 길게 쉬었어야 했다. 괜히 벌써 뛰기 시작해가지고. 저 앞 다리까지는 유달리 긴데.] 

그러다보면 목이 말라 꼭 물을 마셔야만 하는 때가 온다. 그럼 잠시 벤치에 앉아 물을 먹는다. 그리고는 나처럼 달리거나 걷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본다. 집에 가고 싶어지는 내 두 다리를 이끌고 이번에는 집 방향을 향해 또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달리냐고? 일단, 사람답게 사는 순간이 좋다. 

늦은 밤, 퇴근하고 저녁 먹은 상을 모두 치운 뒤 간단한 운동복을 입고 밖을 나선다. 나서면서도 계속 궁시렁거린다. 런닝은 뭐니뭐니해도 옷을 갈아입고 집 문을 여는 그 순간이 가장 힘들다고. 운동할 공원에 이윽고 도착하면 1분 만에 준비 운동을 마친다. 핸드폰으로 자동 달리기 기록을 켠 뒤 무턱대고 아주 천천히 발을 뗀다. 오늘은 왼 쪽부터, 내일은 오른 쪽으로. 코스도 내 마음대로다. 


공원에는 나처럼 혼자 달리는 젊은이들, 강아지를 산책하러 나온 청소년 혹은 할머니, 남편 혹은 자식의 팔짱을 꼭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아줌마들을 본다. 그 안에 내가 있다. 혼자 7평 남짓한 자취방에서 혼자 유튜브를 보며 조용히 하루를 마루리하는 대신, 저녁의 따스하고 건강한 여느 누군가의 풍경으로 나는 자리할 수 있다. 

세상 속에 섞여 나도 그 일원이 되는 기분이 좋다. 평범하고 안온한 산책길, 나는 너네 아빠 이런 짓도 했다며 푸념 섞인 원망을 내뱉는 누군가의 수다 옆을 스친다. 골방에 틀어박힌 외로운 개인으로 숨을 쉴 때에는 느낄 수 없던 온기다. 그러니 내 건강이 좋아진다는 건 별책부록 같은 장점이다. 

나도, 남들처럼, 그들처럼, 한 개인으로, 이 지역사회를 살아내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럼 걸으면서 유유자적 산책이나 할 것이지, 뭐하러 달리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두 번째 이유, 순간의 풀 냄새 때문이다.

 천천히 걸어서는 맡을 수 없다. 열심히 뛰다 보면, 속도에 따라 사람들이 뜨문뜨문 없어지는 잠깐의 산책길을 만난다. 그럼 힘들어서 걷고 있더라도 무조건 뛰고 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운동길에서 훅 들이켜는 향긋한 냄새. 무성한 잡초들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가야 맡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식물의 냄새가 좋다. 


풋풋하지만은 않은, 어딘가 습기를 품은 초록향을 맡으면 나는 하늘을 본다. 그리고 풀숲도 본다. 귀로는 내 숨소리를 듣는다. 또 길을 걸어내는 내 발소리도 듣는다. 

그럼 알게 된다. 내가 나로서 그저 느낀 하루의 소중한 순간이 방금이었음을. 

어떠한 직업인으로, 몇 살로, 어떤 성별로, 어디 사는 사람으로, 나도 모르게 얽매인 느낌과 생각들을 나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잘 돌이켜보면 역할에 씌인 나의 책무적 감상들이다. 그런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그저 한 생명으로 원초적인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이, 요즈음에는 딱 그 때다. 아무도 없는 산책길에서 잠시 지나가는 잡초 냄새를 후루룩 맡기. 힘겹게 내뱉는 내 숨과 더불어 무언가 느껴지는 향에 나는 오늘도 주먹을 꼭 쥐고 “나이스!” 환호한다. 오늘도 성공이다. 내가 나를 나로서 그저 1초라도 느끼기.      


결국 달리기란 요즈음의 내게 내가 그저 생으로 오늘 하루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수단이다.
 나, 오늘도, 어쨌거나, 죽지 않았다고. 그렇게 소중한 순간을 살아냈다고. 
그러니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자고. 나는-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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