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차마 내게 못 물었던 질문들, 그리고 당신 딸이 답하지 못할
언제부터 우울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2년 전 처음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열었을 때 데스크의 간호조무사님께서는 작은 태블릿 하나를 들이밀었더랬다. 간단 우울 척도 검사라나. 상담 센터에 처음 갔을 때에는 고등학생 문제집 크기의 종이들을 한아름 들고 왔었더랬지. 문장 완성 검사, 우울감 및 자해 충동 검사가 내 앞에 똬리를 트고 들어앉아 있었고 나는 거기에서 중복된 질문들에 일관되게 답해야 했다.
"최근 2주간 우울하거나 슬픈 감정이 지속된 적이 있습니까."
"우울하거나 힘들었던 것을 일관되게 느낀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우울감이 시작된 사건이 있습니까."
내 병명은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인한 공황장애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바로 감기처럼 바이러스에 한 번 노출되어 병이 커진 게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울해진 특별한 사건이라는 건 크게 존재치 않는다. 우울증은 한 번에 어두운 늪으로 확 빠져버리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발을 담그고 있던 곳이 늪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늦은 것이다. 그 질퍽거리는 무기력함이 나를 이미 바닥으로 끌어 당기니까.
하지만 추정컨데 이 때도 이미 우울증이지 않았을까 하는 전조 신호들은 꽤 많았다. 그러므로 돌이켜보니 이미 그 때 우울증이었을지도 모를 다양한 시그널들을 모아봤다. 당신의 딸도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잘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1. 우울증 진단 2년 전 : 취중진담 - 살기 싫다고 울고 불고 지랄떨기
친구 집에서 1대 1로 술을 마셨다. 그 때 난 기억이 안 났는데, 다음 날 친구에게서 카톡 메세지가 왔다. "야, 너 살아있냐? 너 병원 가." 엥, 무슨 병원. 나는 물었고 친구가 쯧쯧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정신과." 이게 왜 멀쩡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 하냐, 화를 냈다. 그랬더니 친구 왈,
"너 어제 기억 진짜 안나냐? 기억 안 나는 척 하는 거 아니고? 너 어제 살기 싫다고 죽겠다고 내 앞에서 한 시간동안 꺼이꺼이 울었어. 도저히 안되겠어서 부모님 부를까도 생각했다니까. 집에 갔을 때에도 얼마나 걱정되던지, 너 내가 여기서 자고가라 했는데 또 그건 죽어도 안 하고 가더라?"
나도 모르게 나를 속였던 진심이라는 것이 울컥 술이나 졸음을 통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엉겁결에 기습 공격을 하면 화르륵 무너지는 것 처럼. 그 때에는 그저 술버릇이 고약하게 들었구나 하고 말았다. 혹시 당신의 성인 자녀가 술을 먹거나 피곤에 찌들었을 때 습관처럼 "살기 싫다, 오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지 잘 귀담아 들을 것.
[죽고싶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2. 우울증 진단 1년 전 : 수동 자해 - 잦은 혼술 및 휴식 없애기
스스로를 망치게 놔뒀다. 그게 그 땐 자해인지도 몰랐다. 일주일에 약속을 무리하게 잡고 다음날 직장생활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약속이 없으면 혼술을 즐겼다. 그리고는 멋진 커리어 우먼의 하루라고 포장해 버렸지. 술을 일주일에 네 다섯번 마셨다. 게다가 잠도 줄이고 자기 계발을 하겠다며 공부를 했다. 다양하게도 했다. 토익, 토플같은 영어부터 수능 수학 공부, 컴퓨터 공부까지.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네 스케줄을 듣기만 해도 엄마는 피곤해 죽겠다. 어떻게 그걸 다 하고 살아? 하여간."
욕심이 과다하게 많은 줄로만 알았던 나는, 이제 안다. 스스로를 힘들게 일부러 갈아넣는 것도 일종의 자해 행위임을. 칼로 손목을 긋는 것만이 자해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들은 잘 알아채야 한다. 당신 앞에서 괜찮다고 하하 웃어넘기는 예쁜 딸이 사실 속은 엄청나게 썩어 곪아들어가고 있을 수도 있으니.
3. 우울증 진단 3개월 전 : 현실 도피 - 주말마다 월급 탕진해 여행
이 쯤 되면 함께 사는 부모님은 당신의 딸이나 아들이 약간 힘들어졌음을 눈치채기 쉽다. 하지만 난 자취를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저 취미가 '여행'으로 바뀐 딸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주말마다 여행을 갔다. 사람이 없을 한적한 곳으로. 금요일 저녁에 출발해 일요일 밤에 돌아왔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고 또 여행을 간다. 국내로.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 번씩 여행을 계속해서 가는 사람은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진짜 여행에 미친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삶이 버거워 탈출하고 싶다는 긴급 구조 신호인지 말이다.
4. 우울증 진단 1개월 전 : 원인 불명 눈물 - 샤워하다 울기, 꽃 보다 울기
샤워기를 튼다. 그리고 샴푸를 짠다. 샴푸가 잘 안 짜진다.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운다. 물도 너무 뜨겁다. 또 서럽다. 운다. 머리를 말린다. 드라이기가 콘센트 구멍을 못 찾는다. 난 왜 이것도 제대로 못하나 화가 난다. 또 운다.
대략 이런 흐름이다. 샤워하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진다면, 그건 청결도가 높아진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무언가를 더 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버스를 타도, 내려도, 물건을 사다가도, 창문을 바라보다가도, 꽃이 핀 걸 보고도, 해가 지는 걸 보고도 눈물이 쏟아진다. 제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이 정도면 길가에 지나치는 낯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내 딸자식이 누군가의 시선을 진하게 받고 있다면, 그게 울어서라면 이지경이 되도록 가만히 놔둔 자신을 탓하면서 당신은 무조건 자식을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이미 심각한 수준이니까.
5. 우울증 진단 3일 전 : 병 수긍 - 더러운 방 꼴 보고 인정
설거지를 할 힘이 없다. 선풍기를 틀었다가 옆 방 사람이 쫓아올까봐 두렵다. 에어컨 소리는 너무 커서 잠을 못 자겠다. 옷을 벗을 힘조차 없어 그대로 잠이 든다. 씻지도 않는다. 밥도 거부한다. 연말이라서 그래, 연초라서 그래, 환절기라서 그래, 승진철이라 그래. 당신의 딸은 다양한 이유로 당신의 눈을 속이려고 들 테지만 직감을 믿어야 한다. 이 정도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스스로 수긍하는 단계이긴 하다. 일상생활이 다채롭게 망가져 있으니. 그러니 그저 방 청소를 갑자기 안 한다고 화를 벌컥 내지 말기를. 이 아이가 무슨 일이 있는지, 주의 깊게 잘 살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