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보러 갔다가 뜨개질하다 우는 나약한 딸, 나도 하기 싫단 말야
눈물을 또르르 흘리게 한 범인을 찾아라.
지난 며칠간 나는 1) 전셋집을 보러 다녔으며 2)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도 없었고 3) 엄마랑 전화를 하다가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4) 여전히 잠을 못 자서 새벽에 수면제를 먹어야 하고 5) 글이 또 하나의 허영심으로 자리잡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6)아, 목도리 뜨개질도 하고 있다. 결과는 어떻냐고? 비틀즈의 i will을 듣다가 난데없이 울었지, 뭐.
나는 왜 나를 사랑하기 위해 줄곧 증명을 하려 들었을까, 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그건 나다.
나는 언제 날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될까.
[그래서 널 사랑해] 라는 몇 백 가지의 문장은 잘 갈려진 칼이 되어 나를 자꾸만 찌른다. 그러니 나는 이유 없이 심장이 아파오고,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툭 떨어지는 것이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무조건, 그러니까 다 엄마 때문이야.
또 다시 비수를 꽂는 딸의 선언문.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내 원룸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명확한 이사날짜를 갖게 되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새 전셋집을 찾으러 공인중개소와 약속을 잡았다. 첫 번째 공인중개사는 60대 남짓해보이는 여자분이셨고, 두 번째 공인중개사 역시 60대 중반의 부부였다. 아,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복도식 아파트이다. 거기가 내가 사는 시에서 아파트 중 가장 싸더라고. 더 이상 빌라나 원룸에 살다가는 내 소소한 저축도 사기꾼들에게 홀랑 날아가버리겠다는 위험한 신호가 왔다. 대한민국 이 빌어먹을, 사기꾼들이 판 치고 떵떵거리는 나라 같으니라고. 피해자들이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 뭣같은 부동산 시스템을 봤나. 아무튼 전세가율이 무려 60%에 달하는 옛 아파트가 직장 주변에 있어 나는 일찍이 그 곳에서 다음 자취 생활을 하겠다고 점찍어놨었다. 아파트 단지를 찍어놓으면 공인중개사와 약속 정하는 것 까지는 무척 쉽다. 그들과 내 의견이 달라도 한참 달라서 그렇지.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이 상황을 당신들도 한 번 들어보시길.
1) "아, 저거 결로로 생긴 곰팡이 아니에요?"
-아, 이 정도는 있는 편도 아닌데? 결로 있어도 잘 살아~ 원래 옛날 아파트가 다 그렇지, 뭐.
2) "여기 맨 끝 집이라 너무 추울 것 같아서요, 계약하기 어렵겠어요."
-여기 집주인이 건설 관련 뭘 해가지고, 다 싹 고쳐놔서 괜찮아요. 외풍 하나도 없다니까?
3) "저, 제가 다음에 다시 와서 봐도 될까요?"
-근데 아가씨, 내가 억지로 계약이 되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공인중개사들한테 안 보여줘야 해서 좀 마음이 그래.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생각해요. 이거 주말에 분명히 나간다니까?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해~
4시에 시작한 부동산 투어가 7시가 되어서 끝났다. 소득은 없었다. 갈팡질팡 이거라도 계약할까 했던 내 마음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언니와의 통화로 진정되었다. 결론은 다 나가리. 땡, 실격입니다! 잔치. 공인중개사들과 집을 보고 오면 이상하게 진이 다 빠진다. 피곤한 이 마음 어떻게 달래나 고민하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 일을 함께 결정해주었으면 했다. 나도 진짜 기대볼까 하고. 그랬는데, 엄마가 뭐라 했냐면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혹시나 하고 결로 물어봤더니 다들 고개를 바로 젓더라.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필요한 돈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근데 엄마는 속상해. 네가 대학교에 갔을 때 억지로라도 끌고 왔어야 했는데. 니가 이런 취급 받을 애가 아닌데. 이런 말 지겹겠지만, 공부할 수 있을 때 공부해. 그리고 너는 너 자체로 너무 대단해. 예뻐. 알았지?]
아오 스트레스. 내 힘듦을 같이 감당해달랬더니, 또 저런 말을. 공부하라는 게 무슨 뜻이냐면, 이제라도 직업을 때려치우고 전문직 수험생활에 매진하여 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하란 뜻이다. 유학을 가던지. 이렇게 말하면 우리 집 진짜 돈 많아보이는데, 전혀 아니다. 울먹거리면서 "그래도 너 하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라고 혼자 다짐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데- 난 그럼 이렇게 대답하고 마는 것이다.
[아니야, 엄마. 내 우울증은 직업에서 비롯된 게 아니야.] 라던가
[엄마, 나 요새 신춘문예 준비하려고 열심히 살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같은 말.
위로. 엄마를 위한. 증명.
전화를 끊으니 온 몸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빨간 피가 다 하얀색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모멸감, 죄책감, 분노가 차례로 나를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에 남은 건 결국 슬픔이다. 난 대체 언제 그냥 태어있는 나 자신으로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냐고. 끝맺음으로 너 자체로 대단하다고 포장이나 하면 끝이냐고. 숨이 막힌다. 전화를 끊고나니 이상하게도, 그 때부터 글쓰기가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어떠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걸 찾았다. 인터넷에서 목도리 만들기 키트를 주문했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하지만 심심해 미칠 때마다 뜨개질을 했더니 이틀만에 벌써 목도리 한 개를 다 떠간다.
잡다한 나의 걱정과 상념들이 한 코에 엮여가고, 촘촘하게 서로를 묶은 베이지색 생각덩어리들은 내 목에 둘러져 내 겨울을 포근하게 덮겠지. 그런 상상을 하고 있던 차에 랜덤으로 틀어놓은 비틀즈 플레이리스트에서 i will이 나왔다. 어제의 클라이막스, 눈물의 출현이다.
Who knows how long I've loved you
You know I love you still
Will I wait a lonely lifetime
If you want me to, I will
여전히 널 사랑하는 걸 아니? 내가 얼마나 널 오래 사랑해왔는지 너도 모를거야.
나 영원히 여기서 기다려?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러지 뭐.
내게 들려오는 영어는 저렇게 해석됐고,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슬퍼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발가벗겨진 내 최초의 자아가 내게 손을 내미는 말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개질이나 하고 원룸에 앉아 있는 너를 사랑해 주면 안 돼?]하고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건, 어떠한 생각도 걸치지 않은 순백의 나였다. 오롯이 나인 나. 그냥 나. 태어나보니 나였던 나.
전셋집은 마음에 안 들면 쉽게 탈락시키고 안 볼 수 있다. 이 집은 나랑 안 맞아! 하고 계약하지 않으면 그만이란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도 안 되는 말로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주어도 흔들리지 말았어야지. '네 글 따위 사실 출판사에 들어가기엔 조약하다.'는 이야기도, '머리 자르니 더 나이들어 보인다.'는 품평도 참지 말았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니까, 그냥 사랑해 줄거야.]라고 두 귀를 꼬옥 막아 주었어야 했다. 다 괜찮다고, 너는 그 자체로 엉망인 게 가장 훌륭한 거라고 엄지를 들어주었어야 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한 자격은 없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자꾸만 엄마는 내게 자격을 주입시키려 든다. [넌 원래 잘 할 수 있는 애니까, 이것도 하면 어때?]
목도리가 완성되면 마음 속의 내 자신에게 둘러줄 것이다.
그리고 쓰다듬어 주려고.
'이건 내가 네게 주는, 첫 선물이야.'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