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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ul illang Jan 27. 2024

서툴러도, 일단, 사랑

(13) 사랑 앞에 서투른 나의 시작을 사랑하여 - 일랑

사랑에 서투르다. 어떤 온도의 마음이 사랑인지 분간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덤벼들던 내 스물 몇 살의 시절인연은 모두 사랑이었을까. 탐구하는 자세의 사랑이란, 사실은 가장 필요하면서도 쓸데 없는 시간인걸 깨달은 어느 날부터 인정하게 됐다. 나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의 여자 주인공이 될 수 없게 타고난 사람이라고. 요리조리 뜯어보기 바쁜 여자 앞에 나타날 남자 주인공은 없기에.


내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과 크기는 디즈니 영화 시작에 나오는 성이었다. 환상적이고 푸른, 견고한 모양새.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아래서 아름답게 웃으며 춤을 추고 있을 것만 같은 무도회. 그런 무도회장의 뜨거운 공기 속 마주치는 두 눈길. 내일은 모르지만서도 영원하고 꽉 찬 미래를 약속하는- 해피 에버 에프터나 10년 후 같은 에필로그가 잘 어울릴 수줍은 웃음들. 애니메이션으로 다진 판타지 로맨스가 환상일 뿐이라는 건, 첫 연애를 하며 금방 알아챘다. 한껏 가볍고 야하기만 한 연애라는 장르는 내겐 실망뿐이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연애와 사랑의 분리.
결국 난 마음 한 켠 늘 차가운 연인이 되고 말았다.


웃기게도, 이성관계가 쉬워졌다. 사랑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 여자를 세간에서는 ‘쿨하고 현명하여 남자친구를 믿는, 좋은 여자친구'라고 부르더라. 지나쳐가는 남자친구들이 나를 칭찬하며 좋아할수록, 나는 사랑의 관찰자가 되어갔다. 턱을 괴고 네게 사랑의 크기와 형태를 꺼내 보이라 하는데- 이런 나를 왜 좋아하는 거지. 그러다 누군가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사랑이란 게 제 멋대로 되지 않는 거란 걸 알면서, 나는 그 아득하고 뜨거운 하트를 있는 힘껏 식혔다.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며 칭얼거리는 사람들에게 그간 삐걱거리는 진심을 보이기 싫었나 보다며 지금에서야 이해하는 그 시절의 나. 결국 결혼 앞에서 이별을 선택한 나는 어느 날부터 그런 나를 경멸했다. 미치도록,



내가 미워서
못생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할 자격이 없어, 하고
스스로 연애 자격을 박탈시켰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서, 많이도 아프게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미친듯이 할퀴다보니 곪은 상처가 터졌다. 병원에 갔고, 상담도 받았다. 가족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오늘을 사랑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전히 사랑에 능숙하지 못해 나는 누군가 진심어린 마음을 건네면 얼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내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수만 가지의 눈길, 시간, 잎사귀, 바람 앞에 눈부신 채로 그저 서 있기.
감정이라는 건 참 소중한 거야, 되뇌이며 미소를 띠고서.



세상이 달리 보인다. 마음의 사춘기를 겪어낸 나는 이제서야 서툴러도 괜찮은 게 사랑임을 안다.



그런 내가, 서투른 내가, 사랑을 하려 해.
심장이 흐물흐물해.
때때로 긴가민가해.
그래도, 그냥, 일단,
시작에 용기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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