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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Nov 27. 2023

그대의 계절

4. 백 미터 달리기


3일째


단단한 마법에 빠진 나의 정신력은 대단했다.

살을 베는 듯한 근육통을 하루 만에 이겨내고 하루동안 먹지 못했던 카페인을 들이켰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떨어졌을 낙엽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테오는 어젯밤, 12시를 넘은 시간까지 곁에 머물다 완벽하게 잠든 나의 모습을 확인한 후 돌아갔다.

아직도 그가 앉았던 자리가 따뜻한 것만 같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마치 일 년 동안 꼬박 사랑 속에서 허우적대다 이제야 고개 정도 빼꼼, 내밀어 볼까, 하는 아직 미성숙한 그것에 불과했다. 이 미성숙함은 무언지 모를 것을 자꾸만 재촉했고, 볼 일을 본 후 변기 물이 내려가는 시간만 느껴도 눈물이 났다.


어릴 적 이성 간의 돈독한 사이를 위해 부렸던 자존심과 영화 대본과 같이 길었던 대사들, 그때 은오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그렇게 계획을 짜고 성공을 시키고 웃거나 울거나, 를 했다.


이제는 내게 대본이 필요 없다.

이건 그냥 놓치면 안 되는 가을의 감정이었다.


나는 중얼거리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테오의 목소리 주위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때요? 나려씨”


그가 날 볼 리 없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덕분에…
 고마워요 테오씨”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에게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먼저 말했다.


“어디예요?”


“으음, 여기 덕수궁이에요
 와,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나는 테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옷을 고르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저기, 기다려 줄래요?
 갈게요, 내가…”


“아니, 나려씨
 더 쉬어야 해요
 그리고 지금 바람도 차가워요”


“꽁꽁 싸매고 갈게요”


“꽁꽁?
 오 노노노노 안돼요 정말”


나도 모르게 버럭, 했다.


“아니, 시간이 없잖아요?”


테오가 놀란 듯 또 잠시 말이 없다.

나의 주책과 타오르는 불길을 테오는 이미 짐작했을 터다.


“그럼 꽁꽁?”


“네 꽁꽁 두르고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테오”


늘 늦잠을 자다 지각을 일삼던 나의 행동은 늦었음에도 늘 굼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속도 보다 더 빠르다.


가을의 낙엽이 테오의 머리 위로 하나 더 떨어지기 전에 달려야 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테오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바람에 흩날리는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낙엽들, 그들을 비춰 주는 반짝이는 햇살,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그가 서 있다.


옷이 좀 더 두꺼워진 모습의 이 남자, 후드 티가 참, 잘 어울리는 이 남자, 그래 또 있다, 청바지가 참 잘 어울리는 이 남자, 가을의 계절 속에 꼭 있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지금 내게 브레이크가 없다.


달려가자마자 테오가 나를 멈추기 직전까지 나는 그의 앞에 가까이 섰다. 머플러로 칭칭 동여 맨 목이 뻑뻑하긴 했지만 애써 나는 테오를 올려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 왔어요
 헉헉헉”


테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의 두꺼운 머플러를 한 번 스치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나도 같이 함께 웃었다.


우리는 정말 많이 걸었다.

테오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그리고 우리를 스치며 떨어지는 노란색의 은행잎, 내 인생 중 최고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아닐까 싶다.


밝은 빛이 붉은 노을로 바뀌어 갈 때 즈음, 우리는 따뜻한 커피숍 창가에 앉았다.


갑자기 따뜻한 공기에 나의 코는 루돌프가 되어 콧물이 주르륵주르륵, 주책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감기약 기운에 식은땀을 흘렸다.


테오는 그 모습도 놓치지 않고 나를 걱정했다.


“괜찮아요?
 무리하면 안 되는 데”


“괜찮아요, 난
 진짜 괜찮아요”


테오는 우리가 걷는 내내 찍었던 사진들을 살폈다.

갑자기 일어난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사진기를 내밀었다.

그 속에 내가 가을을 밟고 웃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함박웃음을 지었다니, 갑자기 혼자 남겨진 집에 쓸쓸하게 밥을 먹고 있을 은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테오가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당신 사진으로 전시회를 도배하겠군”


나는 놀란 눈으로 테오를 보았다.


“오 노노노, 나려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요”


난 한참을 고민 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어때요
 난 상관없어요 테오가 맘에 들어하는 건
 나도 좋아요”


“이것 봐요
 나려는 이렇게 웃을 때 눈동자가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어린아이 같고
 음, 뭐라 얘기하기 힘들지만
 매력적이에요”


분명 나의 얼굴은 활화산처럼 붉게 번쩍번쩍했을 거다.


노을빛도 점점 쪽빛으로 남아 있을 때, 나는 지나가는 시간에 우울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오한이 찾아왔다.


“테오?”


사진을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그렇게 응? 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나의 모든 장기를 녹아 없앨 것만 같은 위력을 지녔다.


“말해요”


“며칠 뒤 영국으로 떠나면
 언제 다시 와요?”


그렇다, 나는 말이 안 되는 질문을 했다.

언제 다시 오다니, 그곳이 그의 삶이 있는 곳이 아니던가.


테오가 붉은 나의 콧등을 검지로 살짝 튕기며 말했다.


“아직 계획은 없어요
 하지만 계획은 세우면 되겠죠?
 아마도 전시회 때문에 올해는 아주 바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는 이 남자를 보내면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 은오와 계획했던 그 많은 대사들을 뒤로하고 나의 자존심도 뒤로 한 채 불쑥 말했다.


“내가 갈게요
 내가 가도 될까요?”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내가 간다고”


“물론, 좋아요
 전시회 때 초대할게요”


나는 내심 궁금했다.

이 남자는 나의 대한 감정이 나의 감정처럼 다신 오지 않을 가을과 같은 감정이었을까?

나란 존재에 대해 이 남자는 어떤 경계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 다시 테오가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아, 짙은 나무냄새


테오는 내가 바닥에 깔린 은행잎을 향해 발차기하는 모습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키득거렸고, 나는 마냥 웃고 있는 그가 조금 아쉬웠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 또 짙은 나무냄새


나는 소심하게 그의 어깨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의 향기가 더욱 짙어졌고, 나의 붉은 콧등 밑으로 테오의 따뜻한 입술이 느껴졌다.


아 이런, 테오와 나는 입술을 마주했다. 테오가 얼굴을 떼기 직전까지도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든 세상이 핑핑 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하고 배시시, 다시 웃었다.


아, 그도 나를 좋아한다.


분명.



제법 공기가 차가워졌다.

테오는 가만히 서서 나의 머플러를 다시 튼튼하게 나의 목에 똬리를 틀었다. 머플러를 돌릴 때마다 풍기는 나무 향내에 어질어질한다.


우리는 먹을 것을 잔뜩 포장해서 집으로 향했다.


계속 들이마시는 나의 콧물 소리를 흉내 내며 테오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나를 놀려 댔다.

창피함을 느낄 겨를 없이 나는 이러한 잠시의 웃음이 너무 행복했다.


현관문 복도에서도 우리는 깔깔거리며 걸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우리의 얼굴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은오의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친숙한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은오가 앞치마를 매고 국자를 들고 있었다.

은오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그다음 테오를 한번 훑었다.

은오의 큰 눈은 더욱 커졌고 국자를 들고 있는 손은 멋쩍어 갈 곳을 잃었다.

나의 몸도 움직이지 않고 현관 앞에 박혀 있었다.


은오가 국자를 서둘러 놓으며 말했다.


“어, 어 왔어?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던 참인데…
 잠깐만…”


은오는 허둥대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동시에 이해시키기 위해 재빨리 말해야 했다.


“은오야, 연락도 없이…”


나의 이 말은 핀잔이 분명 섞여 있었다.


“아니 그게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했어”


나는 극도의 불안감과 극도의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테오?
 내 친구 은오예요”


테오는 내가 자신을 소개하기 전에 은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테오라고 합니다”


은오는 테오가 내민 손 대신 고개를 까딱, 거리며 응수했다.

은오는 나의 눈을 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마치 추궁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은오가 나를 그렇게 대한다고 마침표를 찍고 싶어 했다.


대체 왜.


눈치 빠른 테오가 말했다.


“그럼, 난 갈게요
 푹 쉬어요 나려씨”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나의 얼굴이 묻어 나왔을까, 은오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함께 식사하고 가세요”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내가 테오의 팔을 잡았다.


“같이 있어요 그냥”


내가 왜 그랬을 까, 나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의 이상한 말에 테오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은오의 발 그래지는 뺨을.


은오의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그랬듯, 은오의 음식 솜씨도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 보는 맛있는 된장찌개라며 테오는 엄지를 몇 번씩이나 그려 냈다.


테오는 우리가 함께 했던 3일 동안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물음표를 갖고 있던 사람은 늘 나였고, 답을 하는 사람은 테오였다.


테오는 저녁시간 내내 은오에게 질문을 했다. 이상하리 만치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은오의 어머니 일까지 알게 되었고 테오의 눈빛은 계속 은오에게 머물렀다.


나는 그 모습이 꽤 불편했지만 애써 아닌 척, 외면했다.


나는 지금 얼마 남지 않은 그와의 시간에만 집중하고 싶었고, 충분히 함께 슬퍼했다고 생각한 은오의 슬픔 안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은오는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하기 전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적이 있다.

나도 깜박 잊었던 일이다. 테오가 사는 곳과 은오가 연수를 하던 곳이 같은 지역이라니, 둘의 이야기는 나를 외면한 체 계속되었다.


은오의 웃는 얼굴과 자연스러운 대화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나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알지 못하는 영국이란 곳에 대하여 대화가 깊어지고 있었다.

나의 인내심과 자존심도 바닥이 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쉬어야겠어”


그제야 은오는 나를 발견한 것처럼 나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약 먹자”


“알아서 먹을 게”


나의 말은 차디찼다.

테오가 말했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나려씨”


테오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니, 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갔다.

나는 화가 났다.


테오가 돌아간 뒤, 나는 한참을 누워 벽만 바라볼 뿐, 은오를 보지 않았다.

은오는 다시 또 쉴 새 없이 달그락거렸다.


활화산이 터지듯 벌떡 일어나 나는 소리쳤다.


“제발 좀…”


“나려야… 왜…”


은오에게 얼굴도 보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고 나는 울었다.


엉엉 울고 있는 나를 한참을 바라본 뒤, 은오가 다가왔다.


“나려야, 무슨 일이야?
 너답지 않아”


“나 다운 게 뭔데?
 꾸역꾸역 숨기고 참는 거?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너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거?
 너 보고 있으면 아직 더 슬퍼해야 할 게
 남은 거 같아서, 자꾸만 내가
 나쁜 년이 되는 것만 같은 것?”


말을 뱉어 놓은 후,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은오가 말했다.


“아직 슬퍼할 게 남은 게 아니라,
 그건 내가 평생 가져가는 거야
 내가…”


은오가 짐을 챙겼다.


이대로 보내면 나는 엄청난 후회를 할 것이다.


“은오야, 제발”


“걱정 마, 나는 그냥 내 앞에 벌어진 일을
 꿋꿋하게 잘했다고 생각해
 네게 짐을 지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어쩌다…”


“은오야, 그게 아니야
 은오야…”


“가서 연락할 게
 약 꼭 먹고”


그렇게 문은 굳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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