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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Dec 11. 2023

그대의 계절

6. 반짝이는 가을 국화


6일째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테오의 쉴 새 없이 음식에 대한 칭찬에 나는 입이 점점 붙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테오는 어떤 답을 원해서 내게 묻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은오에 대한 칭찬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와, 해장이라는 
 의미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은오씨 음식을 먹어보니 
 아, 이거군요?
 그렇지 않아요? 
 나려?”


나의 고개와 입은 처음부터 동의를 하며 애써 웃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고 미소를 지어 보여야 할 부분에서는 마치 욕이라도 할 듯 미간을 떨었다.


꼭 내가 굉장히 속 좁은 치졸한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던 테오의 성격을 보니, 눈치는 집중력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은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나의 치졸함은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설거지를 했다. 


내 등 뒤에서 흘러 들어오는 그 둘의 이야기와 은오의 웃음소리, 그리고 테오의 수다쟁이 같은 목소리가 나의 신경을 건드렸고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심장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테오는 은오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테오를 좋아한다, 그리고 은오는 나의 모든 것이라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 친구다.


내가 애써 고개를 도리질하고 착한 은오가 밀어낸다 해도 중요한 건 테오에게 주인공은 은오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은오의 웃음소리, 얼마 만에 보는 환한 미소, 슬픔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던 이틀의 시간,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리고 작은 창문에 팔을 기대어 넋을 놓고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보는 게 마지막이 되면 어쩌지, 란 공포스러운 상상을 했다. 


만약, 은오가 테오의 마음을 수긍한다면 나의 친구 은오는 이제 나의 친구가 아닌 테오의 주인공 은오가 되는 것일까,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이 일은 단 한 번의 경험도 없었으며 꺾여 넘어져 다시 일어나 달리는 수많은 경험과는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


은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화가 났다. 

나는 감정을 눌러야 했다. 


“응, 비가 오려나?
 하늘이 말이 아니네
 나처럼…”


“응?”


“아니, 아니야
 비가 올 것 같다고”


은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빛나는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컨디션이 다시 안 좋아 보여
 하루 더 쉬다 가지 그래?
 응? 나려야”


나도 모르게 단어마다 힘을 주며 툴툴거렸다.


“테오는 여행 중이야
 계속 있을 수는 없어”


은오는 분명 난처한 표정이었다.


“응, 그렇지
 내가 테오씨를 생각 못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당연히,라는 유치한 단어를 뱉고 말았다.


“운전 힘들면 테오씨한테 부탁하지?”


더 머물다가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은오를 아프게 할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재촉했다.

은오가 차에 온갖 것들을 챙겨 넣었다.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갈 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얼른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혼자서 이걸 어찌 다 먹어”


사랑에 눈먼 나는 못된 계집아이가 되어 또다시 심술을 부렸다.


“냉동실에 넣어 두고 먹으면 돼”


나는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갈게, 연락할게”


“응, 운전 조심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거야”


테오가 끼어들었다.


“음, 은오씨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초대할게요”


은오가 또 반짝거리며 웃었다. 

초대라니, 벌써 그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이다.


“네, 그럼요
 나려 잘 부탁해요”


테오가 손을 내밀었다. 

은오는 테오를 처음 마주했을 때 테오가 내민 손을 모른 척했지만 지금은 테오 손을 꼭, 잡았다.


“잘 있어요
 다시 만나요”


“네, 잘 가요
 음, 영국까지요, 흣”


나의 입이 툴툴, 재촉한다.


“비 오기 전에 서둘러야 해”


“응, 어서 가 
 나려야 연락해”


“갈게”


우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침묵에 대해 어색하지 않았다. 

테오는 창밖을 보며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꺼내어 읊는 것처럼 보였다.


♬Only God knows Why – Kid Rock♬


다행히도 도착하자마자 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의 양이다 아마도 가을의 끝자락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나는 테오에게 말했다.


“커피 한 잔 하고 가요
 비가 좀 잔잔해지면 그때…”


테오는 차 안에서의 분위기를 계속 가져갈 모양이다. 

알 수 없는 가라앉은 기분에 나의 기분도 좋지 않다.


“좋아요”


테오가 내게 웃지 않는 모습을 내미는 건 지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물이 끓는 동안 대충이라도 연습해야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내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란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꼭, 테오에게 나의 마음을 얘기해야만 한다. 

그가 먼저 내게 말할 기회를 잡는다면 나는 은오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도.


창문 밖이 요란하다. 마치 돌덩이가 창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테오가 입을 열었다.


“참 사납게 오네요”


“가을 마지막 비 같아요
 자 마셔요, 뜨거워요”


“고마워요 나려”


오랜만에 테오의 따뜻한 미소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저 미소를 잃고 싶지가 않았다. 

나의 입술이 두서없이 시작했다.


“테오
 나, 당신 좋아해요
 당신을 좋아해요 아주 많이”


테오가 멈칫하며 무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찾으며 말했다.


“나도 나려란 사람, 참 좋아해요”


나는 답답함에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하는 테오의 말을 막았다.


“아니, 좋아한다고요
 모르겠어요? 사랑하는 것 같다고요
 사랑, 말이에요”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을까, 걱정하는 테오의 감정이 느껴져 나는 너무 슬펐다. 

벌써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테오가 부정의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고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난 알아요 좋아한다는 건
 사랑할 수 있다는 거니까…
 그래서 우린 서로 키스를 했고…”


이번에는 테오가 나의 말을 끊었다. 아주 단호하게.


“아,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나려는 좋은 친구예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나의 심장이 두 조각이 났다. 


숨을 쉴 수 없는 가쁨에 은오의 얼굴이 떠올랐고 나는 도발했다. 

하면 안 되는 말, 시동을 걸만한 그 말을 먼저 꺼내고 말았다. 


아, 내가 테오에게 지고만 거다. 

아예 나는 둘의 관계 멍석을 깔아 주고 있었다.


“은오, 은오가 주인공인가요?
 당신의 주인공?”


처음 보는 테오의 붉은 얼굴이다. 


“나려…
 아 이런,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냐고?
 당신의 눈이 설명하고 있잖아요?”


“아…
 미안해요, 나도 참 혼란스러워요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나는 다시 그를 회유했다.


“그것 봐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거예요
 난 혼란스럽지 않아요, 나를 믿고 따라 줄 수 없어요?”


테오의 붉은 얼굴은 다시 나를 정면으로 응수했다.


“아니,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에요
 너무 갑자기 이런 감정이 확실하게 느껴져서
 혼란스럽다는 뜻이에요
 나려 미안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니…
 미안해요”


“확실? 확실하다고 했어요?
 은오가 당신의 주인공이 맞군요?
 당신의 입맞춤, 두 손길은 내게 먼저 닿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죠?”


난 아마도 은오와 테오가 처음 서로를 마주했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불안함을 자꾸 죄책감으로 치부하려 했던 나는 그들이 느낄 확신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정체 모를 질투와 시기가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테오는 두 손을 마주하며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나려
 하지만 난 나려 같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은오씨와 나려의 아름다운 관계를
 깨트려 버리는 오만한 
 남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이건 정말 우연이고 마치 피할 수 없는
 저 비와 같은 거예요”


테오는 창 밖의 주책맞는 비를 가리켰다.


나는 낮게 말했다.


“비는 영원히 그치지 않겠군요”


우리의 긴 침묵은 서로의 할 말을 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침묵으로 일관한 인사를 나누며 테오는 내게 뒷모습을 보이며 그렇게 사라졌다. 


그는 사흘 후면 이곳을 떠난다. 

처음 테오를 은행에서 보았을 때 오직 그만을 가리키고 있던 환한 햇살과 흐드러진 은행잎과 그의 사진기가 내는 기분 좋은 찰칵, 거리는 소리와 나라는 주인공을 눈에 담으며 보여줬던 미소.

찰나의 필름이 빗물에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웠다. 눈동자 속에 테오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 속에 테오가 둥둥 떠다녔다.


시간은 새벽 4시를 가리켰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나는 휴대전화의 단축키를 눌렀다.


나의 예상대로 놀란 마음에 은오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나려야? 
 무슨 일이야? 또 아파?”


나는 그냥 무작정 울었다. 눈동자 속 테오를 다 흘려보내며 계속 울었다. 

은오는 짐작을 하며 조용히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기다렸다. 


“테오에게 난 주인공이 아니었어”


“아…”


“이제 7일째야
 그는 떠나”


“나려야…”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라도하고 싶어
 억지를 부려서 라도”


“영영 이별하는 건 아니잖아?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잖아? 응?”


나는 은오의 말에 아차 싶었다.

그렇다, 테오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뿐, 그를 영영 보지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말했다.


“다시 만나다 해도
 난 그 사람 눈 속에 없어”


은오가 다짐이라도 하는 듯, 말했다.


“나려야, 잘 들어 봐
 때론 우리의 상황이 잘 돌아가지 않고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말이야
 그땐 이상하리 만치
 더 간절해져,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아, 별거 아니었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더 많더라, 우리 늘 그랬잖아?
 지금 같은 상황이 좀 그런 상황 같아
 그러니까 좀 더…”


나는 은오의 딱 맞는 말, 그 맞는 말을 딱 잘라 말했다.


“만약, 테오 주인공이 
 너라면?”


“응?
 뭐라고?”


나의 침묵이 그 어떤 긴 이야기 보다 은오를 이해시켰을 거라 생각했다. 


“나려야, 대체…”


나의 못된 속성이 또 나오려 애를 썼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너, 지금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거야?”


“왜 내가 악역이 돼야 해?”


은오가 긴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하아, 나려야
 다시는 내게 실수하지 마
 너처럼 나도 아파”


이미 나의 이성은 바닥이 난 상태였고 늘 올곧게 말하는 은오가 더욱더 미웠다. 

은오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졌고 뾰족한 빛, 나의 못된 속성과도 같은 뾰족한 빛이 먼 산등성을 내리친 후 거대한 소리를 냈다.


우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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