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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Dec 27. 2023

그대의 계절

8. 오래 매달리기 



8일째


뜬 눈으로 이틀 밤을 지새웠다. 


테오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 연락에도 답이 없었다. 


이토록 짧은 순간에, 이토록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거세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과연 은오의 말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의 감정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감정일까?


시간이 흐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비웃음의 미소로 결론 지을 수 있는 감정일까?


시간마다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테오가 나를 매몰차게 대했다면 달라질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테오의 숙소를 물어보지 않은 내가 원망스럽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재빨리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눌렀다. 당연히 테오일 것이라 생각했다. 


“테오? 무슨 일이에요?”


휴, 하고 숨을 내쉬는 소리와 리듬은 테오의 것이 아니다.


“미안, 나야 은오”


나의 탄식의 답은 마치 지금은 내게 넌 중요하지 않아,라고 답하는 듯했다. 


“하…”


나의 탄식을 듣자마자 은오의 숨소리가 다시 길어졌다. 이렇게 나는 얼마나 더 많이 은오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인가, 두려웠다.


“잠은 좀 잤어?”


아니야,라는 말을 뒤로한 채 나는 사악한 말을 길게 뱉었다.


“어떻게 잠을 자?”


“나려야…”


은오는 테오에게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못된 힌트 보다도 그의 애정 어린 눈만 느꼈어도 잘 알아차렸을 것이다. 

은오는 그렇게 눈치 빠른 아이였다.

알고 있었을 그 점을 생각하니 나는 더욱 배알이 뒤틀렸다.


은오가 말했다.


“오랜만에 가게 나왔어
 추워지기 전에 창문도 닦고, 바닥도 닦고…
 커피 찌든 냄새가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일부터 다시 돌아가야지”


은오가 마치 너도 일상으로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눈은 시계의 초침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됐네”


“너와 따뜻한 커피 마시고 싶어
 마주 앉아서 수다도 떨고…”


은오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그 생각에 급하게 나왔지 뭐야”


은오의 한숨소리가 다시 길어졌다.


나는 한숨 좀 그만 쉬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미안하지만 테오 연락 기다리는 중이야”


난 은오의 인사도 듣지 않고 이어폰을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휴대폰의 문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것들만 보아도 질척거림, 집착, 매달림, 이라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과연 테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부러 나의 연락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일까?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는 계속 사건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잠시 귀를 스치고 간 기억을 더듬어 나는 테오의 숙소 근처를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나뭇잎이 바싹 말라 길에서 날리고 남은 앙상한 가지들이 하늘 위로 뻗은 모습은 나를 몹시 고독하게 만들었다.


나는 하면 안 되는 짓을 했다.

근처에 있는 숙소를 돌아다니며 테오의 이름을 확인했다. 


급한 일을 핑계로 대화를 시작하면 알아내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나는 테오의 숙소를 알아냈고,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점점 형편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는 내게 모멸감을 느꼈다.


이성은 잘못됨을 인지했지만 간절함이 가득한 나의 감정을 이 짓을 자꾸만 정당화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숙소 옆 카페에 앉아 좌우를 살피고 건너편을 살폈다. 

수면을 취하지 못한 난 꿈을 꾸는 듯, 자리에 박혀 시선을 날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건너편에서 키가 크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그때의 빛나는 나의 테오가 서 있었다. 

주책맞은 눈물이 났다. 


보행자 신호가 천천히 빛을 발하기를 바라며 나는 서둘러 그의 맞은편 거리로 뛰어갔다. 

당연히 테오의 주인공이 아닌 내가 그의 한눈에 띌 리는 만무하다.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걸었다. 


대체 테오는 무슨 생각에 빠진 걸까? 


그의 눈은 허공에 있었고 바뀐 신호를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어색한 연기를 해야만 했다. 

나는 오늘 온통 거짓 투성이다.


그제야 걸음을 옮기는 테오를 불렀다.


“앗, 테오?”


테오가 나를 보았지만 잠시 나의 얼굴을 잊은 사람처럼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분명 보았다. 

물음표가 가득 담긴 시선을.


“아, 아.”


아, 라니? 나는 애써 웃었다. 그리고 또 거짓말을 시작했다.


“여기서 마주치다니…”


그리고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놀랐어요 나려”


“어디 가는 중이에요?”


테오가 숙소를 가리켰다.


“아, 그럼 여기가 숙소?”


고개를 끄덕이며 그도 나처럼 애써 웃었다. 


나는 수십 번도 더 쳐다본 시간을 다시 확인하는 척, 하며 말했다.


“난 일 때문에 약속이 있었어요
 지금 들어가는 길이예요”


테오가 내게 잘 가,라는 인사를 뱉을 까 겁이 나, 나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 기다렸어요
 가기 전 인사는 해야 되니까…
 저기, 괜찮으면 저녁 같이 할래요?”


나는 정말 궁색했다. 


내가 테오라면 거짓말을 말하며 나의 주인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하지 못하는 저 눈동자, 나는 테오의 감정을 모두 읽어 낼 수가 있었다.

난처한 테오.


“아, 약속은 없어요...
 하지만 좀 피곤해서”


나는 테오의 뒷말을 듣지 않으며 말했다.


“잘됐어요 식사 같이해요”


테오의 몸은 숙소로 향해 있었고 나는 그의 팔을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큰 덩치의 남자는 종이 조각처럼 내게 날 듯 이끌려 왔다. 


아, 진한 나무의 향기.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앞이 조금 흐려졌지만 이를 앙 다문 나의 의지가 눈물을 잘도 막아냈다. 


테오는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것도 불고기와 된장찌개라면 사족을 못쓴다고 했다. 

은오가 끓인 된장찌개 맛을 잊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식당 한편에 마주 앉았다. 

처음 우리가 와인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던 것처럼 공기는 어색했지만 나의 감정은 더욱 달달해졌다.

어쩌면 그때처럼 다시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희망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여기 불고기와 된장찌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테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햄버거와 콜라처럼요?”


아, 그가 내게 웃었다. 이것은 긍정적 신호일 것이다. 


테오가 배낭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내게 온 수많은 문자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긴장감은 아예 내 심장이 뛰지 않게 할 것 같았고, 거짓 투성이를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아, 나려…
 문자가 많아서 확인하기가, 이런…”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실수한 게 있었을 까?


테오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아주 천천히 말을 뱉었다.


“혹시 나 기다렸어요?”


테오의 손가락은 숙소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의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이를 앙 다물 수도 없었다.


끝내 나의 눈물이 쏟아졌다.


이성적으로 그의 주인공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사라졌다. 

나는 징징거리는 여자가 되고 말 것이다.


불고기가 끓고 있었고 달큼한 향이 우리 시선 안에 머물렀다. 

표고버섯이 들어간 된장찌개는 눈치도 없이 계속 진한 향을 내뿜었다. 


나의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미안, 해요…
 하지만 어떻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때 테오가 내게 무언가 내밀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주 앳된 모습을 한 은오가 잔디밭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이 갑작스러움과 혼란스러움에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테오는 다시 책을 꺼내 들어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들어 있는 책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점점 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은오의 모습이 아주 잘 담겨 있었다.


햇살 같은 은오의 앳된 모습은 내가 보아도 아름다웠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나려, 내 얘기 들어 줄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테오의 이야기 속에는 7년 전 은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녀를 표현하는 테오의 모습에 나는 말할 수 없이 끔찍했고 비참했다. 

그리고 은오에게 부끄러웠다. 


불고기가 석쇠에 붙어 아예 말라 버리고 있는 중이다. 


테오의 끊임없는 이야기를 나는 잘라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은 들을 수가 없다. 

이건 그들은 정해진 운명이라는 뜻이니까.


“난 바보였군요”


“나려, 미안해요
 이건 정말 나도 몰랐던 우연이었고
 은오 씨도 몰랐던 우연이었어요
 우리 모두가 몰랐던 우연”


“헛, 또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겠군요?
 난, 훼방꾼이 되어 버렸고
 치졸한 사람이 되었죠”


“나려 왜곡하지 말아요
 왜곡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려 가 더 잘 알잖아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려 나려?”


나의 발과 손과 입은 테오가 내민 목소리를 붙잡으라 하지만, 아주 조금 남은 양심과 감정이 그를 떠나오도록 만들었다. 


나는 홀로 아주 오랜 시간 바싹 마른 나뭇잎을 밟으며 걷고 또 걸었다. 


그 무엇으로도 난 테오의 주인공을 바꿀 수 없음을 사진 속의 빛으로 뭉쳐진 은오의 모습을 보자마자 알았다.


어릴 적 은오와 오래 매달리기를 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참 오래 버텼는데…


난 그랬다. 

어릴 적부터 은오에게 지기를 싫어했었다. 

그 어떤 것이든 앞서야 했고 그런 나를 늘 칭찬하고 보듬어 주는 건 은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오를 이길 수가 없다.


찰나로 쥐고 있던 진한 나무 향기가 나의 손에서 날아갔다.

멀리.


♬ 찬바람이 불면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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