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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Jan 08. 2024

그대의 계절

10. 얼음의 계절


12,라는 숫자가 보기 싫을 만큼 이 계절이 닥치는 게 싫었다. 

12월이라니, 벌써부터 귓불이 시리고 입술은 바싹 메마르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테오가 떠난 지 7일이 넘어간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이렇게 간사할 수가 있을까, 내 손에 닿았을 땐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어서 전전긍긍 괴로움에 치를 떨고 아파했었다. 


지금 그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것을 인지한 나의 뇌 속의 감정은 아파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사람을 그저 추억하기만 해도 충분한 느낌이 들었다. 욕심을 세워 봐도 손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은오의 말이 맞다.


손이 닿았는데 불구하고 희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을 땐 사람의 감정이 더욱 폭발하는 것이라고, 발을 동동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자꾸만 테오와 처음 만났던 날, 

테오의 입술처럼 선홍 빛의 와인을 마시며 

테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간질거리던 그 느낌, 

우연히 스친 그의 손길, 

순간의 감정에 치우친 우정 어린 테오의 입맞춤, 

추억을 곱씹다 보면 은오가 마지막에 찾아와 내게 못을 박는다.

아주 처절하게.


그날도 그랬다. 

태양은 왜 은오만 그렇게 빛이 나도록 차별을 했을까, 

은오만 흠뻑 받고 있던 빛도 은오만 흠뻑 받고 있던 테오의 시선도 나와 차별을 했다. 


은오와 나는 단 한 번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은 채 일주일 이상을 지내본 적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일방적으로 은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또 은오의 부재중 전화다. 그리고 또 문자다.


나는 은오의 문자를 확인할 자신이 없다. 


대체 은오의 잘못이 무엇이란 말인 가. 


또다시 은오의 문자를 확인한 후 난,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오직 나의 잘못만으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나의 직업은 번역가다. 


이 직업은 프리랜서가 된 이상 거창할 수 없는 직업이다.

회사에 묶여 있을 때가 안정적이긴 했지만 자유,라는 것을 빌미로 나는 돈 보다 후자를 선택했다. 

당연히 그 덕에 이 나이에 나는 아직도 작은 경차 하나 없다.


일의 연결 고리가 생기면 돈이 작든 크든 고르지 않고 덤볐다. 

하지만 아주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나 두꺼운 책을 내 손안에 집어넣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받아온 여러 권의 아주 짧고 작은 책을 들고 지하철 역으로 걸었다.

마치 헌책을 팔고 다니는 뜨내기 상인처럼.


“하, 지친다”


얼마 전 찾아온 감기의 끝이 이렇게도 지저분할까, 기침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채 기침을 해도 사람들은 기침 소리가 나면 먼저 고개를 돌리며 무언의 집단 따돌림을 하기 위해 그 사람을 찾는다. 


나는 다시 긴 계단을 올라 지하철 밖으로 나섰다.


“후우”


텅 비어있는 나의 심장에 찬 바람이 꽂혔다.

너무 아프고 시렸다.


나의 짧은 숫자가 적힌 통장을 생각하며 젠장, 이라는 말을 뱉었다. 


결국 나는 택시를 탔다.


긴 한숨을 다시 내쉬고 다시 울리는 은오의 문자를 확인했다.


『할 얘기가 있어
 우리 얘기하자
 내려오지 않을래?
 내가 가도 되고…
 연락 줘』


비슷한 내용의 문자가 그저께부터 쌓였다. 

역시 은오는 나에게만은 포기를 모르는 친구다.


택시가 덕수궁 옆을 지나가고 있다. 

그날의 은행잎이 날리는 풍경이 생각나 피곤함도 잊은 채 다시 쓸쓸함이 파고들었다. 


오피스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나는 냄새를 맡자마자 직감했고, 화부터 올라온 나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걸었다. 

목소리는 튀지 않았고 이를 악물며 조용히 힘을 주어 중얼거렸다.


“대체 왜, 남의 집에 멋대로 드나드는 거야?
 왜 왜 왜?
 정말 짜증 나 죽겠어
 누가 된장찌개 먹는데? 
 누가 된장찌개 해 달래?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대?
 정말 지긋지긋해
 유은오”


이건 정말 나의 의도는 아니었다. 

여러 개의 책이 들어간 에코 백이 책의 모서리 덕분에 찢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안아 올리며 문은 그야말로 쾅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은오와 나는 동시에 놀라 눈이 마주쳤다.


나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책들은 후드득 바닥으로 모두 널브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 

그야말로 악을 썼다.


“으아아아아아악”


은오는 나보다 더 빨리 다가와 책들을 줍기 시작했다. 


나의 어깨가 들썩였고 화의 흥분이 분화구에서 넘칠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다. 

그리고 두 주먹은 저절로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은오는 나를 보는 듯 마는 듯, 비위 좋게 말했다.


“들어 가, 우선 물부터 마셔”


은오가 말아 쥔 나의 주먹을 두 번 토닥거렸다. 

나는 그 모습이 더 질렸고 화가 났다.


기어코 화의 분화구에서 아드레날린이 넘쳐흘렀다.


소리쳤다. 물론 내가.


“유은오오”


은오는 노인 마냥 놀라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유은오오오”


당연히 아주 예민한 골드 미스가 사는 앞 집 문이 열렸다. 


은오는 죄송하다는 말이 잘도 튀어나오는 사람이다. 


“나려야 일단 들어가자”


은오가 굳은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은오의 손을 뿌리쳤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섰다.


은오의 말처럼 물을 벌컥거렸다. 

한 잔은 성에 차지 않았고 다시 물을 벌컥거렸다. 

우린 한참을 그렇게 서로 말없이 물만 벌컥거렸다. 


한참 후 은오가 말했다.


“좀 괜찮아?”


나는 은오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은 거 같아?”


나는 잘 안다. 

나의 말은 아마도 은오를 아프게 하기 위해 계속 꼬일 것이다. 

그래서 은오를 볼 자신이 없었다.


“밥 먹자”


“젠장, 그 눔에 밥 밥”


은오가 주걱을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그래, 그 눔에 밥
 그 밥 먹자
 먹고 얘기하자 응?”


나는 은오처럼 말했다.


“좋아
 앉아, 내가 먼저…
 먼저 말할 게”


“흠, 그럴래?”


은오가 앉기도 전에 냉랭한 말투를 뱉기 시작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테오가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테오는 내가 곤란해지는 게 싫다고 했어
난 다 들었단 말이야, 네가 특별하다는 거
넌 그걸, 꼭 나한테 다시 말해야겠어?”


나는 말의 악다구니가 반복되고 있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려야”


나는 은오의 말을 잘랐다.


“아니, 더 들어
 둘의 그런 이야기…
 헛, 둘이라고 말하기 진짜 거북하다
 어찌 됐건 맞으니까...
 넌, 억울하지? 
 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내게 이런 못난 감정이 자꾸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어
 난 테오를 좋아해
 근데 테오는 널…
 그런데 어떻게 내가 널 대해?
 어떻게…
 넌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야?
 네 맘 편해지라고 쳐들어온 거야? 
 이런 나 잘 알면서 왜?
 날 그렇게 악마로 만들고 싶어?”


결국 나는 소리치며 눈물을 흘렸다. 


은오도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너와 나 시간이 계속 흘러도 
만날 수 없었을 거야
서로를 모른 척했겠지…
나려야…
좀 더 일찍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그리고 네가 이러는 거
난 다 괜찮아 얼마든지 괜찮아
이해해,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잖아”


은오가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난 네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어
 아닌 거 알지만 그래도 난, 네 잘못이라고 크게 말하고 싶어
 다 네 잘못이야
 테오를 먼저 만난 것도 네 잘못이고
 테오가 널 좋아하게 만든 것도 네 잘못이야
 모두 다 네 잘못…”


은오가 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나려야…”


오랫동안 중독되었던 은오의 토닥거림에 나는 오랫동안 기대어 울었다. 


눈물에 기운을 모두 뺀 나는 식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연수를 캐나다로 갔을 까
 영국으로 갔어야 했어”


눈물이 체 마르지 않은 눈으로 나는 웃었고 은오도 웃었다. 


우리는 그날, 밤새도록 테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고 

은오의 추억 속에 있는 테오를 들으며 끊임없이 질투했다. 


“언제까지 질투가 튀어나올까?
 참, 나는 끊임이 없네”


나와 테오의 이야기는 은오의 추억을 꺼내 놓은 순간부터 막을 내렸다고 나는 단념했다. 


이 날 내가 느낀 또 다른 의문은 은오의 눈빛이었다. 


나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의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은오와 나는 이 날 이후,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않았다. 


아니 일방적으로 나는 은오를 멀리했다. 

그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앞으로 보고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은오는 단순한 우연의 일이었다고 몇 번을 반복하여 말했지만 누구 보다 나는 은오를 잘 알았다. 


은오는 테오를 추억하고 있었다. 

은오는 아주 비밀스럽게 그를 추억했지만 그 냄새와 눈치를 

은오 보다 내가 더 잘 알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쑥 찾아오길 반복했던 은오는 이제 더 이상 불쑥, 나를 찾아올 수가 없다. 

나의 오피스텔은 더 이상 그들이 7년 만의 만남이 운명적으로 이루어졌던 이곳이 아니다. 


매일매일 은오에게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난 매일매일 그녀를 거부했다.

매일매일 은오는 울었을 것이다. 

이젠 은오의 그 울음이 더 이상 내게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은오에겐 미래의 테오와의 이야기가 분명 남아있을 테니까. 

충분히 행복해질 것이다.


내가 다시, 은오와 마주 앉아 나의 입술로 나의 이야기를,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을까?

아마 나의 입술은 꽁꽁 묶여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겠지.

나의 계절은 사라졌으니까.


나는 통신사 대리점 앞에서 멈춰 섰다. 

서성거리고 고민하고 손자국이 빼곡한 그 유리문 한번 손을 갖다 대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다.

어떤 것에 대한 기대였을까?


“테오에게 연락이 오면 어쩌지…”


그때 빛나는 은오를 바라보는 테오의 눈빛이 떠올랐다. 


“젠장”


그 눈빛에 분노는커녕, 그리움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아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 짙은 나무 향기와 검게 그을린 얼굴과 바다 같았던 눈동자.

그렇게 나의 계절은 끝났다.

나의 휴대폰 번호는 여전히 1프로의 가능성에 목이 메어 비겁하게 남게 되었다.


♬pale blue eyes – the velvet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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