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봉 Jan 15. 2024

그대의 계절

11. 우리들의 계절




정상에 발을 디뎠다고 생각할 때마다 

위로 보이는 절벽과도 같은 돌과 나무들이 나를 계속 막아서는 것 같다. 

이건 마치 끝도 없이 연결되는 출구 없는 미로인 듯하다. 


올해 들어 여섯 번째 등산이다.


절반을 넘게 올라왔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더위가 흘려주는 땀이 아닌 식은땀이 흘렀다. 

밑을 내려 볼 때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올라왔지?”


한 시간 전 산을 오르던 활기 가득히 움직이던 발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바위에 앉아 신발을 벗고 애쓴 나의 발을 살폈다. 


“이 더위에 무슨 등산이야?
 너 그러다 또 탈 나
 난 안가 아니 못 가
 왜 그렇게 네 몸을 못살게 해?
 쉬는 날은 쉬라고 있는 거야
 노동은 이제 그만해”


친구 여은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불에 덴 것 같은 발에 얼음물을 부었다. 

찰나의 시원함에 찡긋, 다시 몰아치는 식은땀에 또 한 번 찡긋, 닦아내는 손수건의 의미는 이미 사라졌다.

 

그때 쉼 없이 오르기만 했을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래 쉬면 더 힘듭니다
 힘내세요”


나는 고맙다,라는 반응이라도 할까 싶어 맨발을 주물럭거리던 손을 뒤로 한 채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넓은 등판의 그는 벌써 아주 빠른 속도로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서둘러 등산화를 신고 다시 모자를 뒤집어썼다. 

얼굴 가리개가 이렇게 걸리적거리다니, 나는 검게 그을릴 피부를 포기한 체 그것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태양은 정수리에서 절정을 뽐내고 있었다. 

턱 밑으로 땀이 고여 방울방울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지레짐작의 감으로 다시 위를 올려 보았다.


드디어, 나는 정상에 도착했다.

이 높은 곳에서 다시 높은 나무가 되어 녹음을 뽐내고 있는 나무, 

조금의 바람도 불지 않는 느낌에 나의 목은 타 들어가지만 나무의 이파리는 살랑거렸다.

대체 무엇에 의해 저리도 살랑거리는 걸까, 

아름다움에 잠시 미소 짓다 섬세하게 전해져 오는 고통스러운 쾌감도 느꼈다.


내 몸속에 짐승이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의 괴성을 내며 악다구니를 썼다. 


“으어어어 억”


나는 다시 넓은 흙더미를 골라 반쯤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시 짐승의 소리가 나왔다.


“으어어 억”


죽을 것만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는 건 순간이다. 

그 순간의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포기,라는 것을 쓴다. 

등산을 처음 시작했을 때가 그랬다.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오기를 몇 번, 

그것을 이겨 냈던 건 치사하게도 테오를 포기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 기억으로 나는 세 번 만에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친구 여은이가 말했다.


“아직도야?
 아직도 그 사람이
 너를 좌지우지하는 거야?”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땐 그랬다. 

하지만 난 지금 은오의 토닥거림과 응원 없이, 테오의 기억 없이 스스로 정상에 올랐다.

다시 뿜었다.


“으어어어”



여은이와 은오 그리고 나는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그렇게 서로의 단짝으로 지내고 있을 무렵, 여은이는 가족들과 이민을 갔다. 


은오와 나는 꽤 꾸준히 편지 연락을 했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우정은 시들시들해져 갔다. 

은오와 나는 여은이와 연락이 뚝 끊긴 체 성인이 되었고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우정이 되어 잊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우,라는 이름이 적힌 메일이 도착했다. 


여우라는 이름은 여은이의 참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고 

그 이름으로 메일을 보낼 사람은 여은이뿐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펼쳐 보았다.

세상에, 진짜 여은이었다.

우리들의 여우는 이민을 가기 위해 오르던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면 꼭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다짐을 지켰고 

또 한 가지의 다짐, 한국 남자와의 결혼도 성공했다.

모두 다 이룬 셈이다.

그것으로 따라온 예쁜 딸아이와 전업주부로서 굉장히 고달프지만 

또한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여은이가 참 부럽다.

오늘은 여은이의 한 달에 두 번 주어지는 귀중한 시간이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 나는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정상에서 하산하기는 오르기보다 더 힘든 점이 많다. 

내려가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면 자칫하다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빨리 하산하려는 욕심은 금물이다.


여은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과 점점 멀어져만 갔지만 나는 서두를 수가 없었다. 



나는 시멘트 바닥에 발을 내리자마자 뜨거운 발바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숨이 차올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여은이가 창가에 앉아 나를 발견하더니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창피함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내 말을 들어줄 리 없는 그녀다.

내가 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여은이가 더 큰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여러분 제 친구입니다
 이 절정의 더위에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저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 
 안전하게 돌아온 제 친구입니다
 격려의 박수를…”


몇몇의 사람들이 여은이를 따라 박수를 치며 엄지를 내 보인다. 

여은이는 참, 별일이 아닌 일을 별일로 만드는 특유의 감칠맛이 있는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박수 소리에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이며 인사를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제대로 된 복화술을 내 보였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응?”


여은이가 말했다.


“그럼 계속하겠냐?”


나는 빠르게 윗옷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벌게진 얼굴은 세수를 해도 소용이 없다. 

젖은 머리를 질끈 틀어 올리고 배낭에서 흰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후끈거리는 얼굴에 바셀린을 발랐다. 


“후, 됐다”


여은이가 자리에 앉기 전 나를 와락 껴안았다.


“얘가 왜 이래?”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
 이 자유의 날에 홀로 술 한잔
 기울일 생각에 끔찍했거든”


“어이구”


“자 첫 잔은 소맥?”


나는 답했다.


“콜”


우린 오랜만에 끊임없이 웃고 끊임없이 마셨다. 


나는 은오가 궁금했다. 

묻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묻고 싶지 않았다. 

여은이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여은이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도 묻지 않을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위가 싹 가신 지금, 역시 소주가 달다.


여은이는 창 밖을 보며 말했다.


“은오가 행복할 까봐 겁이라도 나?”


그 순간 나는 여은이를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뭐 그럴 수 있잖아?
 아니면 속 까만 뻔한 거짓말이지
 나라도 너무 행복하면 싫다”


여은이는 그때의 내 감정을 마치 자기가 느꼈던 것처럼 말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행복해야지
 왜 화가 나?
 새까만 거짓말 아니야
 은오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아니야”


여은이가 삐죽인다.


“거짓말…
 어떻게 사람 감정이 그래?
 난 안 그래”


나는 되려 물었다.


“그런데 왜 자꾸 행복, 이란 말을 하는 거야?
 은오 이야기야?"


여은이가 갑자기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이제 묻는군
 흠…
 은오도 내 친구고
 너도 내 친구야”


“내가 아는 거 말고
 모르는 거나 말해”


“은오가 너 만나고 싶어 해”


나는 은오를 비웃고 싶었지만 여은이를 비웃듯 말했다.


“그걸 새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걘 왜 늘 만나고 싶다는 건지…
누구 맘 편하게?
자기 맘?
내가 만나고 싶었으면 벌써 달려갔겠지”


“에휴, 복잡하다
 그렇게 얽히는 거 
 너무 막장 드라마 같아”


그날, 나는 놀랍지도 않은 짐작 하거나 늘 상상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테오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작가로서 온 모양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엮어 전시회를 열 작정이라고 했다. 

은오는 테오의 그런 계획을 몇 번이나 반대했지만 결국 테오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참담했다. 

잊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아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시간을 걸어왔다. 

이젠 테오의 이름을 들어도 괜찮은 지경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헌데 난 아직도 아팠다. 

아픈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별 짓을 다했지만 아직도 아팠다.


거울 속 나의 얼굴이 괴물처럼 보였다. 

붉게 그을린 나의 얼굴, 퉁퉁 부어 오른 나의 발, 

젖은 땀 덕에 시작된 탈모, 밤 잠을 설치는 나의 검은 그늘의 눈.


다시 또 그 핑계 섞인 못된 말을 읊어야 하나, 이게 모두 다.

은오 때문이라고.


그 이후, 나는 포기라는 것이 때론, 

다른 세상을 열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높은 곳에서 높은 나무가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보는 것을 포기했다.



8월의 여름은 바라보기만 해야 싱그럽다. 

나는 꽤 알려진 작가의 작품을 번역한 후, 긴 여름휴가를 얻어 냈다. 

아주 좋은 결과물이라고 자랑할 순 없지만 

십 년 동안의 나의 애씀의 결과에 나를 안아주고 싶었고 칭찬했다.


나의 포기로 얻어진 건 없다.

하지만 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은오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리울 땐 완벽하게 그리워했고, 

테오의 앞으로 길에 걸림돌이 되어 줘 버릴까,라는 생각을 하며 증오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증오가 쌓이다 보면 테오의 그을린 얼굴의 형태가 생각나 씁쓸한 웃음을 지었고, 

다시 그가 행복해지길 간절히 빌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른 것에 가린 채 아닌 척, 하지 않기로 했다. 

포기는 받아들임을 알려준다. 

오롯이 받아들였다. 

괴로움도 외로움도.


나의 여름은 시골을 선택했다. 


“엄마, 여름휴가 신세 좀 져도 될까?”


나는 엄마의 무조건 적인 예스, 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눌러앉지만 마”


“예스?”


“언제 와?”


“지금”


나의 엄마는 굉장히 독립적인 사람이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엄마가 철저히 홀로,라는 것을 지키며 

사는 것을 보면 나는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은데 
 왜 네가 쓸쓸해?
 오지랖이다”


아이러니한 건 당신의 지독한 홀로, 를 지키며 사는 분이 

딸의 지독한 홀로,라는 것은 두려워했다.


“엄마, 나도 엄마처럼 홀로 살까?”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서운 손길로 나의 정수리에 딱 밤을 매긴다.


엄마와 나는 아주 오래전에 아빠와 헤어졌다. 

사고였다. 

점점 깊은 바닷가로 밀려나고 있던 작은 꼬마를 살리기 위해 아빠는 몸을 던졌고

아빠의 생각대로 꼬마를 안전하게 살린 후 갑자기 닥친 높은 파도에 휩쓸려 갔다. 


우린 아직도 아빠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때 아빠가 미웠다. 

작은 꼬마를 위해 몸을 던졌지만 작은 꼬마인 나를 위해 같이 살아주지 않은 아빠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직도 아빠를 사랑한다. 

그리고 늘 그 그리움을 꺼내 보았다. 


어린 나 앞에서 엉엉 울 때마다 나는 말했다.


“엄마, 왜 또 울어?”


엄마는 지체 없이 답했다. 


“아빠가 보고 싶으니까”


나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슬픔도 당당하게 마음껏 누렸다.

그리고 딸 보다 아빠를 더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거의 반년 만에 찾아온 집이다.

역시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빠의 사진이 보였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액자 속의 아빠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저 왔어요, 아빠”


나의 침대가 이렇게 작았을까? 

참 오랜만이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잘 도착했어?”


여은이다.


“응”


“좋냐?”


“글쎄”


“나려야”


여은이는 꼭 뭔가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 숨을 죽이고 이름을 부른다.


“뭐야? 또?”


“은오 말이야”


“또 그 얘기야?”


“아니 아니
 만약 우연이라도 본다면…
 집도 근처고…
 당연히 우연히 만날 수 있으니까”


나는 여은이의 속셈이 훤히 다 들여다 보였다. 


“그래서? 
 내가 한 달 내내 있을 거란 것도
 얘기했구나?”


여은이가 더듬, 하는 척을 한다.


“어? 에이
 뭐, 한 달이란 얘긴 안 했다?”


여은이는 나의 여름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은오에게 일러바친 모양이다.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은오의 집이 십 분만 걸으면 앞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은오를 마주친다면, 이라는 연습을 해야 했을까? 

식은땀이 났다.


나는 지난겨울부터 나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백자 적어 넣기도 힘든 내 머릿속이 참 한심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과 작가를 접하면서 읽어내고 또 읽어 내길 수만 번

그 연습은 내게 아직 부족한 모양이다.


아주 긴 잠을 잤다. 

이야기가 맞춰지지 않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참, 얼토당토아니한 꿈이다. 


한번 검게 그을린 얼굴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참 볼 것 없는 내 얼굴에 드리운 그을림은 어쩌면 눈에 띄기도 했다. 

동남아 사람인가, 라며 의문을 지을 법한 궁금증을 말이다.


배낭을 둘러메고 노트북을 챙겼다. 

오늘은 적어도 이백 자는 써보자, 라며 다짐했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매미소리에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저 매미소리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나는 가장 먼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꽤 공포스러웠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모자와 선크림은 사치다. 

나를 향해 내리쬐는 볕을 보며 나는 얼굴을 번쩍 들고 걷고 또 걸었다.


아, 은오의 커피숍을 꼭 지나야 큰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다.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또 깜박할 뻔했다.


나름 천천히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걸음의 속도는 서두르는 나의 팔과 어긋나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은오의 커피숍은 캄캄했고 그늘져 있었다. 

꽤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는 느낌이다. 

나는 커피숍 안을 살폈다. 


늘 햇살이 자리했던 이곳이 이렇게 캄캄할 수가 있을까? 

질긴 생명을 갖고 있는 산세베리아가 바싹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휴대전화를 들었다.


“은오 커피숍 말이야”


“응, 왜?”


“문이 닫혔어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거 같은데?”


“전혀 몰랐어
 무슨 일이지?
 나 어제도 통화했는데?”


은오와 어제도 연락을 했다는 말에 나는 안도했다.


“하아, 그럼 됐다”


나는 커피숍 앞 계단에 앉아 오랫동안 넋을 놓았다. 


“그래, 독한 말이 나와도
 싸워도… 
 있는 그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은오의 집 앞까지 왔다. 

굳게 닫힌 문 틈으로 안을 살펴보았다. 

한창 꽃들이 만발해 있어야 하는 시기에 은오의 작은 정원에는 화려한 색깔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흔한 벌도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았다.

은오의 집은 무채색처럼 변해 있었다. 


누군가에게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갑자기 숨이 막혔다. 


또다시 내 탓인가,라는 글자가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내가 은오를 슬픔으로 이루어진 폴더에 갇히게 만든 건 아닐까?


아직도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을 대체 어떻게 잡아 두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무조건 벨을 눌렀다. 

계속 눌렀다. 

그 어떤 인기척도 없다. 

벨을 포기한 체 나는 소리를 질렀다. 


“유은오, 유은오”


대문을 억지로 잡고 흔들었다. 

집 안에서 바둑이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유은오”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쁜 계집애"


낯익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려야…”


뒤를 돌아선 순간 은오가 휴대전화를 꼭 쥐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은오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 땀범벅이다. 

빛나던 은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퇴색해졌고 피폐해 보였다. 


또다시 심장을 세게 얻어맞고 숨이 가빠졌다. 

짧은 호흡곤란에 나는 상체를 숙이고 심장을 툭툭, 내리쳤다.

은오가 다가와 나의 어깨를 일으켰다.


“나려야”


예전처럼 나는 은오에게 쓰러지듯 기대어 그녀를 안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행복해 줘”


은오가 피식, 하며 웃었다.


우리의 거리는 예전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눈치를 은오는 알고 있었다. 

이기적인 것 같아 내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은오는 나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대문 앞에 앉아 긴 이야기를 아주 짧게 나누었다.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예전 우리의 붉게 타오르던 우정처럼.


서로의 거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우린 기약 있는 헤어짐을 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을 들여 보며 이해했고 나누었다.


우린 이날 행복했다.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갈게, 안녕”


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낮게 들었다.


“잘 가, 안녕”


나의 포기로 인한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이는 연습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더 이상 호흡곤란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은오는 커피숍을 처분하고 영국으로 날아갔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남은 은오의 행복을 위해 내 친구 은오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상상했다.

은오가 커피를 마시며 테오가 걸어오고 있는 길을 보고 있다. 

가을의 낙엽이 바람에 날렸고 짙은 나무 향기는 은오를 배시시 미소 짓게 만든다.

바둑이가 테오에게 꼬리를 살랑거린다.


그대들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그제야 나는 참 행복했다.


♬Autumn Leaves – Nat King Cole♬






『나의 계절』


나는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네모 반듯한 등판을 바라보며 산을 오른다.

나는 등판의 주인공이다.

넓은 등판과 나는 여름을 타고 잔잔히 흘러갔다.


그리고 난 웃는다.

우리들의 행복을 생각하며.

이전 10화 그대의 계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