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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Jan 01. 2024

그대의 계절

9. 굿바이, 테오


9일에서 10일째 되는 중간쯤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비에 열어 놓은 창문 앞에서 숨을 길게 내쉬니 입김이 동그랗게 피어올랐다. 

곧 겨울이다. 


테오는 10일을 모두 채우지 않고 돌아간다.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시간이 내게 주는 의미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테오가 돌아간다는 것에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계가 어떤 시작의 의미로 시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인사쯤 나눠야 하는 건 아닐까? 

그가 말하는 좋은 친구라도 말이다.


그날 그렇게 정색하며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멍청하게 굴기는 했지만 그래도, 란 생각에 어쩌면 테오도 나의 인사를 기다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확인한 후, 답장을 받을 수 없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나의 얄팍한 심리는 밤새 그의 답장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잘 가요, 테오
 짧은 가을이 이렇게 지나갔어요
 당신 덕에 많은 꿈을 꾸었어요
 내게 그랬죠?
 난 좋은 사람이고 좋은 친구라고…
 연락 줄 거죠?
 이제 잠 좀 자요
 굿나잇, 테오』


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휴대전화만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두꺼운 카디건을 허리춤에 매고 길고 커다란 배낭을 다리 사이에 받치고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사진기를 들여 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은오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은오를 생각하는 테오를 나도 모르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그 생각을 꺼내 들었다. 

이렇듯,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은오는 테오를 모른 척하며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못된 생각으로 강력하게 뭉친 나는 잘 알면서 못된 은오라고 거짓으로 자꾸만 은오를 둘러싸고 싶어 했다. 


사실, 지금 또한 나는 그렇다. 

난 지금 은오를 미워하고 있다. 

늘 착한 은오가 밉다.

늘 어른처럼 나를 위로하는 은오가 밉다.

늘 옳은 쪽에 바짝 서 있는 은오가 밉다.


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아도 나는 그녀의 옮음의 행동이 그려진다. 

그런 은오가 밉다.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비행기 이륙시간 십분 전이다. 


과연 밤 새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될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테오일까? 보통의 인사일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아주 작은 기대는 왜 사람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따뜻한 사람 나려
 짧은 시간 동안 참 즐거웠어요
 이렇게 많이 웃어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에요 
 나려씨 배려 감사합니다
 좋은 날 다시 만나길』


나의 기대는 역시 헛되다. 


다시라는 단어는 희망일까, 스톱일까. 

나는 다시라는 단어에 희망으로 힘을 실었다. 


이렇게 나의 가을은 만끽도 하기 전에 추위가 먹어 버렸다. 



은오


테오가 남긴 사진에서 향기가 났다. 


은오는 사진을 모두 모아 엄지로 빠르게 넘겨보았다. 

향기가 더욱 진하게 스며들었다. 


테오가 떠났을 거라 짐작한 후, 나려에게 몇 번에나 전화를 했다. 

예상은 했지만 나려는 은오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붉은색의 이루지 못한 통화기록이 마음에 걸렸다.

은오는 통화기록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사실 은오는 7년 전 테오를 나려를 통해 만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우연의 일이 벌어져서 곤란함에 치를 떨어야 하는지 입안이 쓰다.


그때 7년 전 테오의 이름이 테오라는 것도 그가 한국인 2세라는 것도 그 어떤 정보도 없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커피숍을 나왔고 그 후, 테오라는 사람을 생각했던 건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어떤 신고가 들어갔을까, 걱정하던 찰나, 그뿐이었다. 


헌데 신기한 건 나려의 집에서 테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관심이 없었던 그 사람을 단 한 번 보자마자 7년 전 그때의 테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이없는 꿈을 꾼 후, 이불을 박차고 나와 찬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테오는 7년 동안 은오가 담긴 사진을 작품으로서 세상 밖에 내놓았다. 

그냥 막 떠들어 댄 그 이야기를 지킨 셈이다.


그녀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은오는 테오가 테이블에 남겨 두고 간 두꺼운 작품집을 꺼내 들었다. 

겉표지를 만지작거리며 계속 고민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작품집을 내동댕이 쳤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엄마를 보내기 위해 잠시 옆집에 맡겨 두었던 바둑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게 기쁜 모양이다. 

은오의 뒤꿈치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바둑아, 그만 그만
 누나가 너 밟으면 어떡하니?”


바둑이가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괜찮다고.


“왈왈”


“녀석, 이리 와”


바둑이는 엄청난 점프력을 보이며 은오의 가슴자락으로 폭 안겼다.


“나도 보고 싶었어”


바둑이는 아마도 유기견이었던 것 같다. 

6개월 정도밖에 보이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버릴 생각을 했는지, 그런 인간의 얼굴은 박쥐처럼 생겼을 까? 

아니면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가면을 쓰고 있을까? 

어쨌든 사람의 얼굴은 아닐 것이다.


은오는 오랫동안 길고양이들의 밥을 책임져 왔고, 그러는 중 바둑이를 발견했다. 경계가 심한 고양이들이 사료를 탐내던 바둑이에게 하악질을 하고 있었다. 

은오는 빠르게 비에 홀딱 젖은 바둑이를 안아 올렸고, 안자마자 생각은 뒤로 한 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보호소에 데려다 주라는 엄마의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바둑이를 아기 대하듯 보듬고 사랑해 주었다.


“엄마, 바둑이 보호소로 데려다줄까?”


엄마는 바둑이의 귀를 두 손으로 야무지게 닫으려 말했다. 


“뭐? 얘는?
 넌 어쩜 애 앞에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니?”


그렇게 바둑이는 우리 집의 최고 보물이 되었다.


7년 전 테오가 한 말이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난 동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해하지 않아요, 또는 먹지도 않죠”


그 소리에 놀라 한국의 개식용에 대한 말이 튀어나올까, 은오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그 말이 튀어나온다면 은오는 더 이상 당당한 모습으로 테오 앞에서 말할 용기가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은오는 궁금했다. 


전시회 후, 무엇이 달라졌을지.


은오는 쓰레기통으로 다시 급하게 달렸다. 그리고 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미쳤..."


작품집을 집으며 표지를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바둑이를 무릎에 앉힌 후, 작품집의 표지를 넘겼다. 

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는 곳에 시선에 멈췄다. 


테오는 이상한 사람이다. 

눈동자가 맑은 탓인지 사진에 불과한 그의 모습이라도 마치 은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금세 은오의 볼이 발그레했다.


천천히 작품집을 살펴 내려갔다. 

은오가 담겨 있는 작품은 열개 정도였다.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가 마치 소설처럼 적혀 있었다.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처음 본 곳이다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많은 개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경계가 많은 길거리 개들은
그녀에게만은 아기 같은 눈빛을 하며
쫑긋했던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백은 마술 백

밥그릇과 물그릇이 계속 튀어나왔다
마치 자판기처럼


흙 위에서 웅덩이 위에서
더러운 찌꺼기들을 먹던 그들은
오늘만큼
그녀가 운영하는 깨끗한
레스토랑에서 깨끗한 밥과 깨끗한 물을 마셨다


그것도 각자의 그릇에 담아
 뷔페처럼』


은오는 깨끗한 레스토랑, 이라는 단어를 읽자마자 웃었다. 

그리고 다시 볼은 발그레졌고 바둑이가 깰까 저려오는 다리를 아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이건 언제 찍은 거지?”


열 번째 작품이다. 


이건 은오가 테오와 커피를 마신 후, 다시 공원으로 갔을 때였다. 

테오의 등장으로 놀라 미처 먹지 못했던 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계가 가장 심했던 아이 었고 눅눅해져 가는 사료를 옆에 두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노을마저 사라졌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떠났고 은오는 이 장면에서 꼭 이길 것이라며 이를 앙 다물며 기다렸다.


“아, 바둑아”


은오는 길에서 보는 모든 개들에게 바둑이라고 불렀다.


사료를 담은 그릇을 먼발치에 두고 은오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제야 바둑이가 꼬리를 말아 쥐며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은오는 사료를 씹어 먹는 소리를 들으며 아주 기쁘게 웃고 또 웃었다.


『마지막 길거리 개는 
 사료를 모두 먹어 치우자마자
 그녀의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그 둘은 마치 서로를 지키는 듯했고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바둑아
 난 널 데려갈 수 없어
 나도 집이 없단다”


마치 그 말이라도 알아들은 듯
길거리 개는 한참을 그녀와 눈을 마주한 뒤
사라졌다』


마지막 한 장을 남겨 놓고 은오의 집중력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을 읽어내려가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별명인 듯하다

Silverly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찾아 헤맨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헤맨다


만약, 운명의 끈이라는 것이 있다면
많이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오늘도 난 헤맨다』


은오는 작품집을 덮었다. 


“아, 이런..."


감정이 일었다.


테오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은오씨
 난, 전시가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향했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고
 또다시 한국으로
 또다시 돌아가고…”


은오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테오가 한 행동들이 하나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 은오를 마주하자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던 수많은 말들을 눈동자에 담고 있었던 테오

은색의 초콜릿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별을 접어 건네던 테오

인기척 없이 은오의 모습을 미친 듯이 찰칵, 거리던 테오

운명을 믿느냐며 엉뚱한 말을 뱉고 눈시울을 붉히던 테오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떠난 그 테오


바둑이가 하품을 하며 은오를 바라보았다.


“녀석, 너와 난 운명이었겠지?”


“왈왈”


은오는 생각했다.


운명의 끈은 멀리 돌아가도 

언제 가는 만난다는 것을.


은오가 심장의 두근거림을 배시시 한 웃음으로 가리려 애를 썼다.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 George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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