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연농원 원숭이
나의 아빠를 딱 한 마디로 설명해야 한다면 조금 애매하다.
우선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 가정적이냐? 고 묻는다면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가정적이다, 고 말하는 게 맞다. 정말 그렇다. 나의 아빠는 가정적이진 않지만, 우리 셋은 아빠 덕에 봄이 오면 꽃을 보았고 여름이면 바다를 보았고 가을이면 붉은 산을 보았다.
그리고 겨울이면 차가운 얼음 위에서 빙어를 낚았고 하얗게 뒤덮인 산에 올라 하얀 입김을 불어 내며 후후, 하는 소리와 함께 라면을 먹었고, 투명한 비닐 포대를 바닥에 깔고 하얀 눈 위를 타고 내려와 시퍼렇게 멍든 엉덩이도 보았다.
음, 이만하면 굉장히 가정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빠는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친구였으며 친구와 회사 동료와 함께하는 생활은 아빠 삶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래도 아빠는 우리를 부족함 없이 또는 많은 경험을 갖게 해 주었고 그것이, 아빠의 억지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해도 우린 그것을 꼭 경험해야만 했다.
이것을 가정적이다, 고 말하기도 가정적이지 않다, 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다르다.
난 놀이공원이 정말 싫다.
어릴 적 대전 엑스포라는 국제 박람회가 열렸다.
이런 소식에 늘 재빠르던 아빠는 그때도 역시 우릴 데리고 갔다.
아빠의 회색 봉고차를 타고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며 우린 달렸다.
아빠의 옆자리는 늘 엄마의 자리다. 엄마는 이런 일들이 몸에 배어 습관처럼 아주 빠르게 모든 것을 준비했다. 엄마가 준비해 온 가방 속에는 달콤한 과일부터 쫄깃한 오징어, 그리고 시원한 음료수, 그야말로 슈퍼마켓 주인이 따로 없다.
나의 유년, 이라는 단어는 부모의 말을 아주 잘 수긍한다, 는 뜻과 같은 말이다.
언니 우정이도 동생 우성이도 공감할 것이다.
우린 어린 날의 수긍으로 다섯 식구가 늘 함께 우르르, 몰려다녔다.
이날은 작은 이모의 식구들도 동행했다.
우정이는 사촌들과 함께 있어도 늘 따로 다녔다.
그래도 가장 큰 맏이로서 동생들을 좀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졸지에 어린 내가 더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부릅떠야만 했다.
나는 놀이 기구를 탈 수 없다.
난 아직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힘든 아이다.
심한 멀미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에 빙빙 도는 놀이 기구는 꿈도 꿀 수 없다.
사촌 여동생이 말했다.
“난 우재 언니 같이 안 타면 안타”
난, 절대 타지 않을 것이며 절대 탈 수 없다.
나의 이해력이 높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성이까지 나섰다.
“그럼 나도 안타”
나 때문에 동생들이 제대로 놀지 못했다, 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할 판국이다.
막내 사촌이 말했다.
“에이 누나 때문에 다 못 타는 거야?”
저 멀리 의자에 앉아서 우릴 지켜보는 어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우성이의 눈빛은 예스, 라 말이 나오길 잔뜩 기대하며 눈을 번뜩였다.
정신 나간 용기였다. 정신 나간 용기를 하필이면 이때 하느님이 내려 주셨다.
정작 필요할 땐 주지 않던 이런 정신 나간 용기를 말이다.
“후, 알았어, 타자”
미친 짓이었다.
때론 88 열차, 때론 청룡 열차, 지금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이다.
나는 타는 순간부터 눈을 감았고 온몸에 힘을 가득 싣고 안전바가 뒤틀릴 정도로 꾹, 잡았다.
느린 속도로 시작하는 이 기계는 사람의 심리를 아주 잘 다룬다.
이 롤러코스터는 아무래도 기계를 다루는 사람과 심리를 다루는 사람의 합작이 아니었을까?
내가 어디쯤 왔을까,라는 상상을 할 무렵, 기계는 잠깐 숨을 고르며 멈춘다.
난 이때 의심했다. 눈을 뜨는 게 덜 무서울까, 아니야 이대로가 좋을 거야, 라며 스스로 다독이는 중이었다.
순간 나는 가위에 눌리는 느낌처럼 내 몸이 공중에서 여기저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360도,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중력이 나의 위를 자극하고 있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말을 했다.
“그만, 그 마안, 제발 멈춰, 제발 그만 으악 하느님 도와줘요”
질끈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 기계가 쉬는 순간 그다음을 대기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그 쉬는 순간이 가장 큰 공포다. 그것만 참아내면 끝이 날 것이다.
그래 참자.
굵고 예의 바른 남자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울렸다.
그리고 기계는 멈추었고 나를 짓누르던 쇳덩이가 공중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꾹 감고 있었는지 내 눈을 접착제로 붙여 버린 것처럼 잘 떠지지 않았다.
함께 기계에 올라탔던 동생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수다를 떨었다.
나는 여전히 기계에 몸을 의지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 그 순간 내 다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동생들 앞에서의 체면이고 뭐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자리이고 뭐고, 없다.
나는 울었다. 누군가 날 잡아 줘야 일어날 수가 있었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꽤 길었다. 나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고, 말이다.
기계에 완전히 박혀 버린 나를 보고 안내원 여자가 나를 재촉했다. 얼른 내려야만 했다.
우성이가 나를 잡았다.
“누나 빨리 나와
한 번 더 타려고?”
난 우성이의 손을 잡고 의지를 하며 두 발을 천천히 시멘트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조금 걷다 말고 그 자리에 슈퍼마켓 가방에서 나온 것들을 모두 토했다.
마지막 국물까지 짜내어 깔끔하게 게워 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기억은 사라졌다.
아빠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고,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난 그날 하루 종일 바닥을 걷는 것이 힘들었다. 공기 중에 떠 있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놀이 기구 중 그 어떤 것도 탈 수가 없었고, 그 누구도 나와 함께 타길 원하지도 않았다. 세 살 꼬마도 타는 회전목마도 타면 속이 메스꺼웠다.
나의 이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꿈을 꾼다. 공중에서 열차를 타는 꿈을.
그래서 나는 놀이공원이라면 질색 팔색 난리를 친다.
아빠가 말했다.
“이번에는 자연 농원이야”
자연 농원은 현재 에버랜드를 말한다.
아빠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동생 우성이다.
우성이는 놀이공원을 좋아한다. 물론 우정이도 놀이 기구를 잘 탄다.
하지만 우정이는 가족들과, 더 자세히 말해 동생 우성이와 내가 함께 가는 놀이공원은 싫었을 것이다.
사진 찍은 모습을 보기만 해도 우정이는 뾰로통, 입을 대발 내밀고 찍은 사진투성이다.
물론 이날도 우정이 성격에 맞게 아주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나는 이날 기분이 정말 좋았다.
우리가 원숭이가 있는 동물원을 지나갈 때였다. 철망 안쪽에 갇힌, 원숭이들은 정말 사람처럼 제각각 생겼다. 갑자기 우정이의 으악,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독립적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오던 그 찰나에 철망 사이로 아주 착한 원숭이가 아주 못된 우정이의 머리카락을 잡은 것이다. 원숭이도 알아봤던 거다.
저 못된 성질머리를.
나는 가만히 서서 고흐의 그림을 볼 때처럼 그 광경을 감상했다.
우정의 비명을 들은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첫째를 위해 원숭이의 손을 잡아채, 멀리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우정이는 머리카락을 뽑아 갔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독한 우정이다.
엄마와 아빠는 저 원숭이가 왜 저럴까?
왜 가만있는 아이한테 덤빈 걸까? 라면서 나름의 정의를 내리려고 안달이었다.
나는 나름 저 좁은 철창에 갇혀 있는데 화를 내지 않을 원숭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을 가둬 놓고 우리는 돈을 내고 구경한다. 하지만 그 돈은 사람에게 간다.
원래 동물은 자연에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최상위 포식자라 해도 이게 정당화될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동물원, 이건 웃기는 사업이다.
자연으로 인해 태어난 인간 주제에 자연을 가두고 구경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돈을 내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난 원숭이가 무서웠다.
사람처럼 생긴 눈과 손가락, 그리고 붉은 살로 보이는 생식기와 엉덩이는 더욱 무섭다.
그런데 우정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니, 난 그날 이후부터 원숭이를 숭배하기로 결정 내렸다.
엄마와 나는 우성이, 우정이가 놀이 기구를 타는 동안에 함께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거나 뭔가를 먹거나, 우린 그게 다다.
생각해 보면 엄마도 놀이 기구를 타지 못했던 것일까?
그게 맞다면, 난 엄마 딸이 확실한 거다.
그래, 절대 날 주워 오진 않았다는 증거다.
일찍 서둘렀던 터라 집에 돌아오면 여름의 긴 해는 또 아빠를 밖으로, 밖으로 나오라는 주술을 부린다.
오늘의 아빠가 한 가정적인 역할은 아마도 한 달은 갈 것이다. 그동안 쌓인 엄마의 불만은 그저 입속에서 나오지 않고 머물 것이다.
우정이는 원숭이와의 조우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째려본다.
혹시 나의 그 미소를 들킨 걸까? 나는 조금의 후한이라도 있을까 내내 눈치를 보는 중이다.
엄마는 슈퍼마켓 가방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하루 종일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할아버지는 엄마를 또는 우리를 달갑게 바라보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원더우먼이 아니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엄마를 보니 나는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난 엄마를 미워했던 마음을 조금 접어 가슴 깊은 곳에 미뤄 두고 가방 정리를 도왔다.
버릴 것과 따로 담아야 할 것들을 분리했고 설거지가 필요한 것들은 개수대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그런 내게 아무 말이 없었다. 칭찬을 듣고 싶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는 또 조금 서운했다.
엄마는 땀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삼겹살 밥상을 차려냈다.
할아버지는 싱그러운 상추에 삼겹살을 얹어 놓고 한 손으로는 큰 컵에 소주를 따라냈다.
할아버지는 소주를 마실 때 꼭, 쪼옷 쫓, 하는 소리를 내며 마치 소주를 빨아먹듯 그렇게 마셨다.
그리고 상추쌈을 한입에 넣고 아작아작, 하는 소리를 내며 먹었다.
우성이는 하루 종일 놀이 기구를 타느라 힘들었는지 삼겹살을 굽는 냄새에도 꿈나라다.
우정이는 그제야 독립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큰일이다. 원숭이와 우정이와의 뜻밖의 조우가 생각나서 자꾸만 웃음이 배시시 나왔다.
아, 나는 지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엄마는 자연농원에서 입고 있었던 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양말도 아직 벗지 않은 상태다.
난 할아버지가 한 것처럼 상추 위에 삼겹살을 올리고 하얀 쌀밥도 함께 올려 엄마의 입 앞에서 멈췄다.
“자 엄마”
당연히 엄마가 아, 하고 씹어 먹으며 아주 친절하고 부드러운 복숭아를 쥐여 주던 엄마의 목소리로 아이고, 역시 우재뿐이네,라는 소리를 또는 아주 간단하게 맛있다, 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조금 기대했다.
갑자기 엄마는 아주 깊고 긴 한숨을 내쉬며 미간에 우물과도 같은 깊은 내 천자를 그리며 말했다.
“됐어 너나 먹어”
뇌에서 갑자기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란 말이다. 우정이가 나를 흘긋, 하며 사악한 저 주둥이를 올렸다.
나는 동그랗게 말아 쥔 상추를 내려놓으며 이상한 짓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짓이다.
나는 된장을 먹지 않는다.
아니 그 이상한 색깔과 모양을 한 이것을 난, 절대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를 위한 쌈에는 그것이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고 이 쌈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가 난 엄마에게 숟가락으로 머리통을 얻어맞을 것이다.
난 소리 내지 않고 행동도 작게 우선 삼겹살을 내려 보았다.
그리고 된장이 묻지 않은 부분을 골라 잘라먹었다. 젠장 흰쌀밥에 된장이 범벅이 되었다.
이건 먹을 수가 없다.
아, 우정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너 뭐 하냐? 더러워 죽겠네 진짜”
그제야 설거지 중, 엄마가 나를 돌아보며 손을 탁탁 털며 그것을 낚아챘다.
“아유 정말 별짓을 다 해 아주”
엄마는 삼겹살이 들어 있지 않는 그 된장 범벅 쌀밥을 씹어 먹었다.
그러게 이왕 먹을 것을 진작 내가 준 쌈을 먹어 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최소한 된장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난 고통스러웠다. 그런 엄마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골라 먹은 삼겹살에서 쿵쿵한, 된장의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오만상을 찡그리며 미친 듯이 물을 마셨다.
몇 컵을 마셨는지 난 배가 불러 남은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난 엄마에게 아주 드센 욕을 먹었다.
오늘 하루의 끝도 우재의 풀 죽음, 이다. 하지만 난 밤새 떠올렸다.
원숭이가 내민 그 아름다운 손짓을.
겨울 방학이 시작되면 우린 다시 한 살을 먹고 학년이 올라간다.
그리고 또 학급이 갈린다. 그렇게 또 친구도 갈릴 것이다.
나의 성장은 역행하지 않고 잘도 흘러가지만, 친구에 대한 또는 이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점점 더 지식이 없는 사람처럼 역행한다.
처음 붉은 성에 입성했을 그때처럼.
또다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건 관계, 에 끝이라는 글자를 합쳐 점을 찍고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정희와 새 친구 호연이는 수진이가 이재경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재경과 수진이는 조금씩 친해지고 있었고, 수진이가 말하는 남자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만큼 그 관계가 형성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재경이 수진이에게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희는 한근수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둘의 관계 또한 계속 지속되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나의 버스에 대한 곤혹스러움도 더 커지기 시작하고 있을 즘이다.
난 한근수라는 놈이 내가 탄 버스를 타고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다.
그놈이 눈에 보이지 않은 건 꽤 되었고 내 머릿속은 한근수를 떠올리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그랬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또 그 남자 고등학생들이 버스에 올랐다.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학생이 탈 리가 없는데 또 시간이 어긋난 것인가, 아니면 공부를 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열 일을 다하는 것인가?
갑자기 복잡해진 버스 안은 내가 내려야 하는 곳에 대한 불안함을 안긴다.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버스 문 쪽 앞에 바싹 기대어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무리 복잡해도 난 내가 내려야 할 곳에서 제대로 내릴 수 있었다.
아, 이것들이 또 장난을 시작했다.
내 머리카락이 돼지털 같다는 둥, 내 어깨에 비듬이 떨어졌다는 둥, 코딱지를 파서 내 옷에 묻힌다, 는 둥, 나의 정신을 흩으러 놓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말려 들지 않는다.
절대로, 한 마디라도 내가 그들에게 했다 간 또 이상한, 또는 나쁜 관계 형성이 되고 말 거다.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는 관계 형성만으로도 나는 고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덧붙일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난 그 코딱지 같은 소굴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찬바람이 얇은 블라우스 사이로 들어왔다.
으으으, 춥다. 역시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을 그 길을 나는 외롭게 걸어야 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듣기 싫은,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다.
그냥 모른 척, 걸었다.
소름이 끼쳤다. 한근수다.
“야, 우재”
난 속으로 대단한 숫자로 욕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 자식이 정말 미친 건가? 왜 따라 내렸지? 왜 나를 부르는 것일까? 나는 뒤 돌았다.
눈을 마주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캄캄하고 저 멀리 있는 가로등에도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은 눈에 띄었다. 마치 연립 아파트의 놀이터 화장실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저 귀신같은 놈이 불러 놓고 말을 안 한다.
“할 말, 없으면 갈게요”
나와 관계 형성이 무, 인 한근수에게 나는 존댓말을 했다.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한근수가 알아듣길 바랐다.
“바래 다 줄게”
뭐? 어쭈? 아주 지랄한다.
이 정신 나간 자식이 지금 나에게 바래다준다고 한 것인가?
난 대답 없이 내 갈 길을 걸었다.
싫다는 눈치를 주고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눈치를 주기 위해서다.
한근수가 내 걸음에 맞춰 걸었다.
난 그게 싫어서 걸음을 더 빨리 걸었다. 내가 빨리 걸으면 한근수가 또 따라 걸었다.
미치지 않고서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걸 까.
집 앞에 다다랐을 때 한근수가 다시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할 말이 있어”
나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빠라도 이 광경을 본다면 한근수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 상황이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근수가 죽는 꼴은 나도 보긴 싫다.
나는 급하게 잘 보이지 않는 뒤쪽 놀이터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엄마나 아빠나 언니 우정이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래가 깔린 놀이터의 공간을 보고 씨름이 떠올랐다.
우정이가 체육대회에서 씨름으로 이겼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한근수가 빨리 입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점점 더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나는 숫자를 센다. 앞으로 50을 더 채울 동안 저놈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있는 힘껏 뛰어 집으로 갈 것이다. 그렇게 뛰어 봐도 빠른 걸음에 불과하겠지만.
숫자 50에 가까워질 무렵, 한근수는 입을 여는 대신 씨름하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얘가 지금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난 앞으로의 나의 입장이 정희보다 더 곤란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린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릎을 꿇다니, 한근수는 정상이 아니다.
마치 드라마를 찍고 있는 듯해 보였다.
난 정상이 아닌 이놈에게 말했다.
“이상한 행동을 하네요?”
“미안해”
한근수는 분명 로맨스 영화나 막장 드라마를 많이 본 것이 틀림없다.
난 속으로 외쳤다. 너와 나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너와 난 편지를 몇 번 주고받은 것뿐, 네가 이러는 건 억지다,라고 나는 말해야 했다. 우리는 학생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근수는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한근수가 말했다.
“정희는 안 만나”
“그걸 왜 나에게 말해요?”
한근수와 정희가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조금 놀라긴 했다.
정희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내 잘못이야”
미치겠다, 정확하게 한근수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상태다.
다른 친구처럼 또는 수진처럼 한근수는 내가 자기를 정말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 이 자식까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째서 나의 외모에서 풍기는 솔직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님 나의 외모는 거짓투성이 감성 꾼 따위로만 보이는 것인가?
“정희가 먼저 나와 연락을 끊었어”
정희는 또 어른스럽게 일을 대처한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은 정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다니, 순간 더 신경 쓰지 못했던 점이 미안했다.
“내 일도 아니고 왜 미안하다 해요?
이해가 안 되네”
“사과를 받아 줄 수 없다는 뜻이야?”
나는 오직 따듯한 공기가 흐르는 내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 자식은 참, 영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 같았다.
“아니, 나한테 무슨 사과를 해요? 난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때 한근수가 천천히 일어나며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기분 나쁘게 말했다.
“들어갈게요”
한근수가 나의 팔을 잡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주 빠르게 그 손을 뿌리쳤다.
“한 번 기회를 달라는 얘기야”
“아니, 저기 요, 나는 관심 없다니까? 처음부터 진짜 그랬다고
무슨 기회를 줘? 착각이 너무 심한데?”
도무지 한근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정말 착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이때 궁금한 게 생겼다.
어떻게 마음이 그렇게 왔다 갔다, 그렇게 빨리 옮겨 다닐 수가 있는지 말이다.
그건 정말 궁금했다. 또다시 정희를 배신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근수를 비꼬며 말했다.
“아니 그쪽 마음은 어떻게 그렇게 쉽지? 헛, 대단하네”
이 말은 정희가 신경 쓰여서 한 말이었다.
정희는 한근수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돌아서서 걸었다. 빨리 뛰어갈 생각이었지만 그게 잘 안된다.
젠장 저렇게 하얀 얼굴로 사람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 약해지고 있지 않은가, 무슨 남자가 저렇게 약해 보이는 건지.
한근수가 또 나를 부른다.
“네가 마음이 풀릴 때까지 뭘 하면 돼?”
참, 답답한 사람이다.
내가 굳이 네가 싫다, 는 말로 끝내 줘야 한단 말인가, 그래 말 한마디로 끝내고 튀자.
“난 꼬인 마음도 없고 뭘 풀어낼 그런 사연도 없어요”
결국 나의 나약한 자아는 싫다, 는 단어를 내어놓지 못했다.
나는 말을 끝내자마자 뛰었다.
한근수가 뒤통수에 대로 소리친다.
“그럼, 사과... 받아 준 거로 생각한다?”
아뿔싸, 이렇게 뛰어가는 나는 마치 화해를 해서 부끄러움에 뛰는 소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말도 안 된다. 난 저렇게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다.
나의 할아버지도 이 정도로 대화가 안 되지는 않는다.
한근수란 놈은 분명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골치가 아프다. 뭔가 잘못 걸려든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난 그놈이 공포스러웠다.
나는 수진이에게 그 일을 말했다.
여전히 한근수에 대한 나의 마음을 의심하는 수진이는 잘 됐다, 는 말을 먼저 했다.
“야 나 진짜 걔 싫다니까?
왜 내 말을 안 믿어? 나 지금 누구랑 대화하냐?
걔 너무 소름 끼쳐”
난 버럭 화를 냈다.
수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정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싫다고
아니 혼자 드라마를 찍고 있다니까?"
수진이는 내게 알았다는 말과 함께 한근수를 욕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한근수에 관한 그 어떤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수진이가 좋아하는 이재경에 대한 일도 말이다.
우린 겨울 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집에 머무는 건 싫었지만 추운 겨울 쌩, 부는 바람을 맞고 버스를 타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리고 한근수를 마주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나는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왜, 지금 일어나는 것일까, 아직 방학이 되려면 일주일도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이다.
드디어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난 이제 잠시지만 고단한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 버스 특유의 멀미 나는 냄새도 맡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바라던 건 늦잠을 자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 권력자의 유리 단면 같은 목소리와 투박한 손가락으로 머리통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방학은 방학이니까 이즘은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방학을 맞이해서 가장 바빠진 건 우정이다.
우정은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으로서 집 안에서 아빠보다 더 큰, 하느님보다 큰 권력을 지녔다.
어릴 적 우정이가 지니고 있던 그 권력은 새발의 피, 라 말할 수 있다.
요즘 우정이가 휘두르고 있는 이 무서운 권력은 가족 모두를 오들오들 떨게 했고 눈치 보게 만들었다.
때론 좀, 불쌍하기도 했다.
늘 잠이 부족한 눈을 하고 있었고 아빠와 엄마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다 못해 곳곳에 뿌려져 있는 부담을 주워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난 우정의 부스스한 얼굴을 보며 대학교를 갈 때까지 이 사람을 좀 더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봐준다고 말하면 모두가 비웃겠지만 말이다.
이 와중에 다행인 건, 우정은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전은 학교에서 오후는 그곳에서 공부한다.
사실 그곳에서 공부한다는 건 아마도 확인해 보지 못한 사실이지만 엄마와 아빠는 언니를 믿고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우정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정의 친구, 유정이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 한단 말이다. 이 불길함은 대입 시험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한동안 생각나지도 생각하지도 않던 그놈에게 전화가 왔다.
왜 하필 전화를 내가 받았을까, 왜 하필 집에는 아무도 없었던 걸까, 이럴 때 아빠라도 있었다면 그놈은 호되게 혼이 났을 텐데, 싹을 잘라버릴 절호의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한근수가 말했다.
“만나자, 집 앞으로 갈게”
나는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얘를 다시 만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없다, 아니 있어도 만나고 싶지 않다.
“두 시까지 갈게”
나는 이 자식이 버스를 타기 전에 내 다리를 부러뜨려야 했다.
하지만 신은 내게 그런 능력을 주지 않았다.
제멋대로 내 대답이 나오지도 않았음에도 이 자식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한근수도 내가 사는 근처에 살았다.
왜 하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을까, 갑자기 늘 버스를 함께 탔고 나의 뒤통수를 보고 무슨 생각이라도 했을 놈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나는 수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말했다.
수진이는 너무 놀라 자기가 버스를 타고 온다고 한다.
순간 나의 영혼이 수진이의 가슴속에 닿을 것 같았지만 그런 감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한 시간이 걸린다고”
나의 목소리는 거의 울기 일보직전이다.
“야, 안 되겠다. 우정 언니는?”
“당연히 없어 독서실에 놀러 갔어”
수진이는 놀러 독서실에 놀러 갔다는 말에 잠깐 피식거리다 말했다.
“그럼 신고라도 할까?”
언니 우정이가 아무리 나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해도 언니는 언니다.
우리가 연립 아파트에 살았을 때 나를 또는 우성이를 못살게 굴거나 때리는 아이들이 있으면 우정은 그게 누구든 간에 응징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 가는 눈을 휘갈기며 날았다.
그것은 아빠의 맞고 들어오지만 말아라,라는 말을 고스란히 옮겨온 행동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믿음직, 이란 단어는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다.
“아빠나 엄마한테 전화하면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우 안돼 안돼, 아빠를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어"
나는 아빠를 감옥에 보낼 수는 없다.
나의 아빠는 젊은 시절, 엄마를 훑어보는 남자들만 있으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검지와 중지로 두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고 한다.
“니들 눈깔 이를 뽑아 놓기 전에 눈알 깔아”
이 일화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로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 아빠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내겐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나는 결정했다. 집 안에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알았지?”
멀리 있는 수진이는 자신이 날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아마도 모르는 가 보다. 깡마른 수진이가 듬직하진 않았지만 고맙다.
시간이 째깍째깍 얄밉게 흘렀다.
가만히 시곗바늘이 원을 그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면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누군가 껌을 딱, 딱 씹는 소리처럼, 그 비슷한 소리가 난다.
평소 시곗바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다들 말하지만 집중하면 그 소리는 아주 정확하게 들린다.
주위의 소리는 고요해지고 초침 소리만 딱딱,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딱, 딱, 두근거렸다.
두 시가 조금 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맨 꼭대기 층이다.
나는 혹시라도 들을 까, 맨발로 베란다로 나갔다. 방충망을 열고 밑을 내려 보았다.
으헙, 나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젠장 그놈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이 마주친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놈은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다.
그놈의 편지가 문제다.
나는 벽에 바싹 붙어 나무늘보처럼 바닥을 기어 거실로 옮겼다.
그리고 멈추고 있던 숨을 쉬었다. 한겨울이 아니라 한여름이 찾아온 것 같다.
지금 떠오른 생각이지만 한근수는 내가 나가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뿌리를 내렸을 놈이다.
남의 생각과 입장은 절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놈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바보처럼 그 전화를 받았다. 한근수가 전화했으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엄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여보세요?”
한근수의 목소리다.
“왜 안 나와?”
나를 본 것인가, 나는 얼음처럼 굳어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아빠가 오실 시간이야, 나가지 못해”
“그럼 오시면 나와 기다릴게”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아씨, 내가 왜 나가는데? 왜 만나?
할 말 있음 지금 말해”
내가 또 실수한 것이다.
반말은 우리가 어떤 관계다, 라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기다릴게”
나는 수진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방법은 없을 거다,라는 생각에 굳게 마음을 먹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난 목도리로 깁스를 한 것처럼 목을 칭칭 감았다.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거나 생각하거나 연락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아니 생각해 보아라, 우린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한근수는 마치 자신이 굉장히 나이가 많은 어른인 것처럼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일에 자꾸만 심각하게 다가왔다. 우리들의 만남은 정말 무궁무진하게 미래에 펼쳐져 있는데도 말이다.
한근수는 두 팔을 겨드랑이에 끼고 모래 위를 서성거렸다.
나는 바닥을 보며 걸었다.
난 한근수가 숨도 쉬지 못하게 일 분 만에 이야기를 끝내고 튀어 갈 것이다.
자, 준비.
“난 할 말 없어요, 그러니까 빨리 말해요 아빠가 오실 시간이니까”
나는 그놈이 아빠라는 단어를 조금이라도 협박으로 듣길 바랐다.
“편지도 쪽지도, 왜 답이 없어?”
사실 한근수는 여러모로 내게 연락을 취했다.
그 내용은 즉 슨 이 사람은 내가 자기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로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두고 나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답장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내가 답을 해요? 아, 진짜 미쳐버리겠네
친구도 아니잖아요?"
난 한근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난 눈을 놓지 않고 계속 보았다.
“네가 사과를 받았잖아”
“하, 정말 미치겠다”
나는 설명을 하려 다 입을 다물었다.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보았다.
한근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의 눈에는 고집보다 더한 오기가 보였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오기와 망가진 자존심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그것을 꼭 복귀시켜야 살 것 같은 사람인 거다.
이 놈은 나를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 나로 인해 망가진 자존심, 그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아닐까.
이 자식은 정말 뼛속까지 나쁜 놈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정말 이 짓을 끝내고 싶었다.
갑자기 충현 오빠가 생각났다. 일러바치고 싶었다.
충현 오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난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리고 이런다고 망가진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내가 생각해도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충현 오빠와 나는 아이들 수준에 맞게 우리는 안정적으로 그렇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자식처럼 이상한 영화를 찍는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이건 맞는 이야기다.
갑자기 한근수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 오기 어린 양쪽 눈이 브이 자를 그리며 양쪽 관자놀이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입이 달싹거렸다.
지고는 살지 못하는, 성격 한근수.
나는 그런 한근수를 계속 빤히 바라보았다.
망가진 자존심은 이제 나의 이 한마디로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현실을 바라본 후, 그다음의 대가는 내가 치러야 이 자리에서 점을 찍을 수 있다.
한근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진짜 치아가 부러질 만큼의 힘을 주고 있는 소리였다.
“너, 진심이냐?”
“난 거짓말 안 해요
진짜 최악이야"
으헉, 갑자기 내 뺨에서 번개 같은 불빛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나의 얼굴이 오른쪽 어깨 위로 돌아가 있었다.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일은 지구가 사라지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이 어린 나이에 말도 안 되는 막장 드라마라니.
한근수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것도 있는 힘껏, 망가진 자신의 자존심이 우뚝, 설 수 있는 힘만큼, 힘을 주어 날렸다.
난 움직이지 않았고 그 자식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이 자식은 자신의 낮아진 자존심을 지키며 그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을 즐기는 삶 속에 사는 인간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쁜 새끼, 잘 들어 이걸로 니 망가진 자존심이랑 퉁쳐 줄게
넌 이런 질 떨어진 귀싸대기 수준밖에 안 되는 놈이야"
와, 내가 생각해도 정말 멋지고 상대방이 열받을 만한 소리였다.
나는 칭칭 감은 목도리를 풀어내고 한근수 발 앞에 침을 뱉고 나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그놈의 표정을 살폈다.
한근수의 독기 어린 얼굴은 갑자기 초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일그러져 가고 있었고 나는 살며시 아주 고요하게 아주 티 나게 그놈과 눈을 마주하며 다시 미소 지어 보였다.
그놈은 아예 녹아내려 오징어가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의 걸음은 결혼하는 신부처럼 가볍고 우아했고 나비 같았다고 생각한다.
난 탄산음료를 잘 먹지 못하지만 얼음을 가득 넣은 탄산음료를 사막에서 꿀꺽, 마신 것처럼 시원했다.
나의 뺨은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난 태어나서 그 누구에게도 뺨을 맞아 본 적이 없다.
만약 이 사실을 엄마와 아빠가 알게 된다면 저놈은 죽어야 할 것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나는 베이비파우더를 얼굴에 잔뜩 발랐다.
발개진 얼굴은 아예 핑크빛이 되어 버렸다. 이건 더할 나위 없이 더 티가 났다.
나는 이날 저녁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 등을 돌리고 얼굴을 돌리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지만 슬픈 건 엄마 아빠가 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한근수에게 뺨을 맞은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끝이 났을 거다.
어디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워 먹은 놈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수진에게도 정희에게도.
그놈은 비겁하기까지 한 놈이었다.
얼마 후 난 또 편지를 받았다. 한근수의 소름 끼칠 정도로 정돈된 글씨였다.
하여튼 글씨 하나는 완벽했다. 외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것들은 뭐, 거의 완벽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비겁한 놈은 자신이 내 뺨을 때리는 것을 후회한다, 미안하다, 잘 지내라, 고 말했다.
거기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놈의 마지막 글은 내가 정말 재밌다고, 생각하는 코미디언 이경규 아저씨보다 더 웃겼다.
그날 자신의 그 행동은 나를 좋아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 준다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조금의 협박도 잊지 않았다.
이 자식은 끝까지 개자식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반려견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더 생각나는 과한 욕, 그놈에게 어울릴 만한 욕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한국어 사전에는 없을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이놈만 없었다면 그 시간에 나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잠깐 멈추었던 나의 뇌 성장을 빠르게 감아 성숙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