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작가가 사람을 그릴 때 그 개성을 그리기보다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이나 본질을 그리려고 했다면,
나는 그 그림을 초상화나 인물화가 아니라 인간화(人間畵)라고 부르겠다.
욕망, 분노, 좌절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욕망이 거의 없거나 분노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고, '좌절' 따위는 자기 사전에 없는 낱말인 사람도 간혹 있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 즉 무(無)를 향한다는 사실만큼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무화(無化)하는 사람을 그린 그림,
단적으로 말하면 '무의 초상'이 가장 전형적인 인간화다.
누구든 자신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를 바란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오는 '얼굴 없는 남자'처럼 해야 한다. 자기 인생 최고의 모습으로 치장하기보다는
'얼굴 없는 남자'처럼 '아무것도 없는 형상', 즉 무의 형상으로 작가 앞에 서야 한다.
그러나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형상'이 될 수 있나?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아무것도 아닌 형상'이라고 바꿔본다. 형상이되 형상임을 뽐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작가가 그 형상의 형상화에 집착할 의무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형상'말이다.
누드를 그리는 원래 목적은 바로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형상'을 그리는 것이다. 내부에
품고 있던 무(無)의 씨앗이 점점 커져 터지고, 터진 부분으로부터 무의 액즙이 외부로 빠져나온
인간을 그리는 것이 누드화다 그러나 이러한 무화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모델의 옷을 벗기지만,
그 벗긴 몸이 미(美)든 추(醜)든 더 절실하게 유(有)를 드러내기 때문에 누드화는 필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앙상하게 뼈만 남아 겨우 서있거나 위태롭게
걷기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조각상들을 만들었다. 또 드로잉선(線)들에 의해 배경이 모델을
침식해 들어가는 듯한 그의 그림들은 무화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보다 더 인간의
진실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아래는 무의 초상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들이다.
<Face, Oil on Canvas, 72.7 x 60.6 cm, 2007>
<Face, Oil on Canvas, 72.7 x 60.6 cm,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