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 부끄러워서 말씀 안 드렸는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진짜 괄약근 근육을 최대치로 조이고 있었는데요. 진짜 피식하고 조금 새 나왔는데. 그게 마이크를 타고 전 강의실에 다 울려 퍼져서.”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요새 마이크 성능 참 좋죠?”
“저는 기술의 발전을 증오해요.”
“모든 발전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거거든요. 기술의 발전을 저희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맞게 적응은 할 수 있지요. 발표 준비를 하실 때 지금껏 항상 조용한 곳에서 준비를 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사람이 있고 다양한 소리가 나는 곳에서 발표를 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너무 조용한 장소에서 발표 준비를 하다 보니 고객님의 숨소리가 잘 들려서 불안을 느끼실 수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음이나 자기가 할 얘기에만 신경을 씁니다. 남이 내는 소음이나 남이 하는 얘기에는 고객님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마이크에 대고 뀌지 않는 이상은요. 내일 발표하시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일이니까 앉아 있고, 각자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나 해야 할 말에 대해서 생각을 하며 듣는 척을 하는 경우일 겁니다. 그러니 비슷한 상황인 카페나 공원 같은 곳에서 발표 연습을 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제가 항상 저희 집 화장실에서 혼자 거울 보고 발표 준비를 해서.”
“또, 고객님의 고민을 들으신 사수분이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시고 고객님의 발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하시고 계시죠? 발표하기 전까지 이 문제가 신경 쓰이신다면 한번 사수분과 대화를 해 보시면 어떨까요? 내 발표와 숨소리가 너무 신경 쓰여서 당신에게 고민을 말했는데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 그러는 게 좋을까요?”
“네. 고객님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여 대답을 드리는 데 한계가 있지만, 걱정을 가지고 계신다고 해서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혹 저희 회사에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스스로를 정말 이상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오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심지어 정신병원이나 심리상담까지 받으러 다닌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걱정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죠. 인류가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벌써 멸종하고도 남았죠. 추워 죽을까 봐 걱정해서 옷 껴입고, 불 피우고. 더워 죽을까 봐 걱정해서 선풍기 만들고 에어컨 만들고 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 아닙니까.”
사장은 고객이 발표 때 방귀 뀐 사건으로 시작해서 인류의 기후대처 방안까지 도출해 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다.
“아, 걱정하는 게 그렇게 나쁜 게 아니구나.”
“네. 맞습니다. 고객님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인류가 아직 살아남은 겁니다. 육지의 지배자였던 공룡도 멸종하고 바다의 포식자인 고래도 멸종위기에 처했는데 말이죠. 위험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걔네들이 걱정을 안 해서 결국 그 꼴이 난 거죠.”
뭐라고? 공룡이 걱정을 안 해서 멸종했다고? 이렇게 논리가 이어진다고?
“사장님, 저는 정상인 거죠?”
“네.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걱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욱더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위험은 서서히 징후를 보이면서 찾아옵니다.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 미세한 징후를 읽어 내죠.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를 취해 놓는 겁니다. 일단 걱정은 저희 걱정보험 주식회사에 맡기시고 회사 일에 열중하시기 바랍니다. 발표에 이렇게 진심이신 걸 보니 고객님의 커리어는 창창할 거 같아요. 저희가 알려드린 방법대로 해 보시고, 그래도 불안하고 진전이 없다면 주저 없이 전문기관을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꼭 저희 회사가 추천하는 방법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잘 알아보셔서 좋은 전문가를 만나 현재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장님이 말씀하신 방법이 가장 좋은 거 같아요. 다른 고객들도 저랑 비슷한 분들이 많다면.... 아까 보여 주셨던 그 계약서 어디 있죠?”
능숙한 사장은 계약을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처음에 계약서를 보여 주려고 하다가 병원이니 전문기관 이야기를 꺼내면서 계약서를 다시 서류첩에 넣어 두려는 시늉을 했다. 인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선택지가 사라지려고 하면 조바심이 생긴다. 서둘러서 없어지려는 선택지를 보고 성급한 결정을 내려 버린다. 나도 사장의 이 개수작에 걸려서 계속 걱정보험 주식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 나머지 이야기는 9월 중순 <걱정보험 주식회사> 책으로 출판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