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의 달리기
10월을 넘어 11월에 접어 드니 날씨가 시원하고 달리기에 이상적이다. 이제 11월 중순으로 들어가면서 쌀쌀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계절은 그리고 세월은 참으로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듯.
우리는 너무 덥고 길어진 여름 날씨에, 그리고 지루한 장마에, 그리고 갑자기 다가오는 너무 추운 날씨에 불평불만들이 많은데, 요즘 같은 날이라면 그리고 계절의 어김없는 변화에는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갖고 살아야 할 것이다.
지난여름을 기억하는가. 7월부터 9월까지 덥지 않은 낮과 밤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엔 장마라 그런가 보다 했다. 비가 오나 안 오나 만 따지다 더위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장마가 끝났다고 마냥 좋아만 했었다. 그다음부터 몰아치는 더위는 진한 습기와 함께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때마침 지난여름은 내가 ‘런뽕’을 맞아 한참 달리기에 미쳐 있을 때였다. 추위를 잘 타는 나는 순진하게도 맘껏 달릴 수 있겠다고 좋아했었다. 더위는 상관없으니 비나 오지 말아라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마 기간 중 잠시 비가 안 올 때 뛰고 좋다고 하던 나는 결국 뜨거운 여름의 러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새벽에 뛰면 괜찮겠거니 생각했는데 더위는 새벽까지도 침투해 1k도 채 뛰지 않았는데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렇다고 저녁에 뛰면 좋을까. 열대야는 저녁을 오히려 더 더운 느낌으로 만들었다. 역시나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이렇다 보니 아침이나 저녁 5~10k 정도의 거리를 뛴 것만으로 빨래는 쌓여만 갔고 빨래 바구니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어디 빨래뿐인가. 당시 휴대폰을 러닝벨트에 넣고 뛰던 나는 러닝벨트, 헤어밴드 혹은 모자, 팔토시, 양말까지 싹 다 젖는 경험을 해야 했다. 친구의 조언대로 샤워를 하기 전에 옷을 물로 헹궈 널어놓는 일을 며칠 해봤는데 역시나 퀴퀴한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햇볕에 일찌감치 말려 두는 게 더 나았다. 널어 말려 놓은 빨래를 주말에 한꺼번에 세탁기로 돌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다.
이런 진절머리 나는 더위에 러닝은 페이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5,6월은 러닝 시작 초반이어서 페이스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뛰려 했고 나의 생활패턴에 러닝을 새겨 넣으려 노력했다. 점점 러닝에 재미도 붙고 일상화되면서 슬슬 페이스에 욕심이 생겼다. 아니 어쩌면 드디어 그 개념을 인지했다고나 할까. 나의 초반 페이스는 대체로 킬로당 6분 전후였다. 그 정도면 10k는 충분히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점 러닝이 습관화되면서 페이스가 빨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나는 당시 나이키 앱을 사용하고 있었다). 재미가 붙어 컨디션이 괜찮으면 한 번씩 페이스를 당겨보는 재미가 있었다. 5분 30초, 5분 10초.. 이건 대체로 5k 거리 기준이다. 결국 5분까지 찍었다. 정말 최선을 다하리라고 맘먹고 온 힘을 다해 뛰어도 5분 벽을 깨기가 어려웠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는데도 말이다.
아침에 뛰어도 저녁에 뛰어도 마찬가지였다. 한계임을 인식하고 포기하고 있다가 나중에 더위가 가시며 뛰는데 문득 넘어가는 걸 보고 더위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았다. 물론 체력이 좋아진 것도 있겠지만 도저히 나가지 않은 몸을 생각하면 더위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폭염 속 러닝에서 페이스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날이 기니 주로 아침 출근 전에 러닝을 했는데, 주말에는 한 번씩 한강에 나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러닝을 시작한 큰 계기도 한강이었고 장거리를 뛰고 났을 때의 성취감과 뿌듯함은 일상 러닝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프 대회 준비도 해야 했고 오래오래 뛰어 멀리까지 가는 건 일종의 로망이었다.
한강에 가려면 좀 더 일찍 해가 뜨기 전에 가야 하는데 종종 컨디션 조절 문제로 잠도 좀 자고 준비도 해야 하는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다. 그러면 영락없이 더위 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한 번은 장거리 러닝에 대한 설렘으로 충분히 준비하고자 잠도 푹 자고 테이핑도 하고 선크림도 충분히 바르며 준비했더니 벌써 8시 무렵이 되었다. 아직 초보라서 장거리 런에 부담이 있던 터라 맘을 단단히 먹는데 시간이 걸릴 때였다. 일단 뛰는데 날이 금방 더워지기 시작했다. 몸이 금방 데워졌으니 워밍업은 쉬운데.. 뛰면 뛸수록 불안해지는 게, 이러다 탈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얼굴이 새까맣게 탈 거라는 불안감, 탈수 현상을 겪을 거라는 불안감이 점점 현실이 됨을 느꼈다. 가양대교 정도 갔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 그러면 하프 거리였다 - 10k 정도 도달하니 더위가 장난이 아닌 것을 느꼈다. 더위에 지친 나는 염창동 근방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10k가 넘으면 근방에서 물과 음료를 마시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를 했는데, 이번엔 뛰어서 돌아올 생각으로 간 거라 별 대비도 안 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땀범벅의 옷과 운동화를 신고 지하철을 타는 게 민폐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중교통은 생각도 안 했다. 문제는 택시도 안 잡힌 것. 이 뜨거운 태양 아래 다시 온 거리를 가고 싶진 않았었다. 근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땀으로 선크림 씻겨져 얼굴이 다 탈 것이 걱정되었지만 느릿느릿 달려온 길을 돌아갔다. 더위에 지쳐 중간에 쉬길 몇 번. 이젠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식힐 데가 없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목동 근방에서 수돗물에 세수도 하고 간신히 간신히 구일역 근방까지 왔다. 거기서 더 가길 포기하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게 생각나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몸에 이상이 생길까 봐 걱정을 많이 하며 씻고 푹 쉬었다.
그 뒤로는 더위에 무모한 짓 안 하기로 했다. 탈진보다 걱정인 게 자외선으로 인한 피부손상이었는데, 이런 러닝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사실 그걸 알면서도, 러닝에 대한 욕구는 피부노화로 인한 절제 기제를 뛰어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달리기는 해야겠고 피부는 지켜야겠고. 밤에 뛰어야 하나? 아님 새벽 일찍? 혹시나 하고 안면 마스크를 쓰고 뛴 적이 있는데, 5분도 안 되어 땀에 다 젖고 호흡도 어렵고.. 바로 접었다. 어쨌든, 한 여름 러닝은, 선크림을 충분히 바르고, 오전 8시 전에는 끝내야 하고, 오후 5시 이후에나 나갈 생각을 하는 게 현명하다.
8월 무렵, 나는 새로운 도전으로 10k를 일상화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5~6k를 일상화해 왔으나 좀 더 거리를 늘릴 필요를 느꼈다. 속도가 안 되니 거리라도 늘리자는 것일 수도 있고, 거리를 늘려 뛰고 났을 때 몸 상태가 좀 더 개선되는(?) 듯한 느낌도 좋아 시도해 보기로 한 것. 마침 친구 남편 중에 sub3 주자가 있는데 매일 10k를 하신다니 그게 인간이 못할 목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문제는 시점이었다. 8월이면 더위가 한창인데 가능할까? 사실 ‘뽕’에 취한 자에게는 그런 이성적인 논리가 잘 안 먹힌다. 일단 해보고 부작용이 발생하면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다는..
일단 해보니 되었다. 근데 역시 문제는 더위. 한 여름에 해가 그렇게 일찍 뜰 줄이야. 아침 출근 전 10k면 적어도 1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하고, 기상 후 준비하고 안양천까지 가는데 15분은 잡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미적대느라 늦어지면 5시에 일어난 대도 5시 40분에는 러닝시작이니 중간에 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뜨거운 여름 태양을 맞아야 한다. 완주를 하고 나면 마치 한 낮인양 더위는 온 땅을 덥혀 놓은 뒤다. 온몸은 땀으로 젖고 목도 마르고 핑하고 어지럽기까지 하다. 매일 10k가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자연스레 자제하게 되었다.
이런 폭염 속의 러닝은 8월 15일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 물론 8월 말이 되면서 간간히 뛰기 좋은 날이 있긴 했지만, 더위는 그 뒤로 한 달은 더 지속되었으니 이번 여름은 정말 기록적이다. 9월 중순 추석에도 열대야를 경험했던 걸 보면 지구가 비정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내 평생에 기후 때문에 달리기를 멈출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실 신청할 때는 폭염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9월 1일 더위 한가운데에서 나는 첫 하프코스를 뛰게 되었다. 여의나루에서 열리는 스마일런페스티벌. 10k 대회보다 나중에 신청한 하프코스가 등록되어 결국, 시작은 하프가 되었다. (악필, 2024.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