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던 짓을 하면 좋은 이유 3가지
루틴은 글을 멈추지 않게 해 준다
이전 글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의지보다 시스템이 더 오래가고 루틴은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자리에 앉히는 힘이 된다고. 그런데 루틴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앉고 같은 구조로 쓰다 보면 문장이 점점 메마른다는 느낌이 드는 때도 찾아온다. 단어는 나오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않는다. 글이 아니라 형식만 남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 이제 진심으로 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가?’
이럴 땐 종종 오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동기나 마음이 아니라 감각의 고갈에 있다. 창작은 결국 감각의 일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그 모든 것이 문장의 재료가 된다. 그러니 익숙한 루틴이 계속 반복되면 감각이 점차 닫히고 자극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구조 속에서도 문장이 살아 있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럴 때 창작자에게 필요한 건 더 센 자극이나 더 촘촘한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낯선 감각을 경험해 보는 것. 작은 새로움이 감각을 환기시키고 감각은 다시 문장을 이끈다. 루틴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각을 돌보는 일은 필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각 순응(sensory adaptation)’이라 부른다. 같은 자극이 계속 반복되면, 뇌는 그것을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절약한다. 향수를 처음 뿌릴 때는 짙게 느껴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는 향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장소, 같은 루틴, 같은 입력 자극만 받다 보면, 어느새 뇌는 문장에 대한 반응을 줄여버린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안 하던 짓’을 한다. 처음 가보는 카페에 가거나, 걷지 않던 골목을 걷고, 전시회를 본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먹고,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을 장르의 책을 읽는다. 이런 시도들은 평소의 루틴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루틴이 메마르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한 감각 회복의 시간이다. 익숙한 구조 안에서 새로운 감각을 주입해 주는 리듬, 말하자면 감각의 루틴인 셈이다.
신경과학자 스티븐 코틀러는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으로 ‘낯섦’을 꼽는다. 그는 몰입(flow)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주요 요소 중 하나로 ‘예측 불가능한 자극’을 강조한다. 뇌는 낯선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경계심과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평소 사용하지 않던 뉴런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각도, 새로운 단어, 상상하지 못한 전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집필이 지지부진하던 어느 날, 무작정 전시회를 보러 가거나 멋진 풍경을 보러 떠난 적이 있다. 작품과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고, 그날 밤엔 며칠을 붙잡고도 못 풀던 한 장면이 이상하리만큼 쉽게 써졌다.
글의 내용과 눈에 담은 것들은 와 무관했지만 낯선 자극이 내 안의 감각 회로를 다시 켜준 건 분명했다. 글의 전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보는 감각 자체가 지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안 하던 짓’은 나에게 세 가지 중요한 효과를 준다.
창작자는 감정과 감각을 다루는 사람이다. 매일 같은 장면만 보다 보면, 익숙함은 안전 대신 무감각을 가져온다. 낯선 소리, 냄새, 풍경은 닫힌 감각을 서서히 흔들고, 그 흔들림이 문장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새로운 행동을 하면 뇌의 시냅스가 새로운 연결을 시도한다. 특히 산책, 관찰, 전시 관람 등은 창의적 사고와 관련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를 활성화시킨다. 이 상태에서는 기존의 사고 틀을 넘어선 연상이 유도되고,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도 높아진다.
새로운 행동은 도파민을 분비시켜 뇌의 보상 회로를 작동시킨다. 감정 기복이 잦은 창작자에게 작은 성공 경험은 큰 회복의 실마리가 된다. ‘오늘도 못 썼다’는 무력감이 아니라, ‘오늘은 색다른 걸 해봤다’는 미세한 성취감이 다시 쓰게 만드는 힘이 된다.
결국, 루틴이 나를 자리에 앉게 만든다면 낯선 자극은 그 자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계속 쓰고 싶다면 루틴은 필요하고 루틴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익숙함을 때때로 흔들어줄 작은 변화도 함께 있어야 한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창작자에게 있어 탈선이 아니라 회복이다.
익숙한 것을 벗어나면 보이는 것이 있다.
닫혀 있던 감정, 지나치던 풍경, 오래 묻어둔 말들. 그 모든 것이 가끔의 낯섦을 통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