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설 aka꿈꾸는 알 Apr 15. 2024

'입사20일 신입'이 20년 선배를 가르쳐도 되나요?

새끼염소인 신입에게 많은 걸 바라지 말아 주세요

"알 쌤, 다음 주 월요일에 직원들 대상으로

 연말정산 안내 교육 진행해 주세요."


컴퓨터 타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계장님 말씀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제가요?"


"응, 알 쌤이 급여 담당자잖아.

교육하겠다는 계획 공문 오늘 기안해 줘요."



내가 급여 담당자인 건 당연히 알고 있는데...

입사한 지 이제 막 2주 차에

교육을 내가 진행한다는 게 뭔가 아이러니했다.


살면서 한 번도 연말정산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20번도 넘게 연말정산을 했을 선배님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정규 근무시간에는,

아직 다 익히지 못한 회사 프로그램으로

직원들 급여 작업을 했다.


모두가 퇴근한 저녁 6시 이후

민원이 없고 조용해진 그때부터


세무서에서 받은 두꺼운 연말정산 책으로

혼자 남아 공부하며 교육을 준비했다. 



눈이 더 쌓이기 전 어쩔 수 없이 밤 10시에 퇴근해서도,

집에 가서 또 책을 보며 공부했다.


다른 지역의 급여담당자와

새벽 12시까지 통화하며

급여 작업과 교육 준비를 했다.

(그 지점도 나처럼 신규가 급여자리로 발령이 나 

우리 둘은 서로 의지하며 겨우 새끼줄 잡듯 버텼음)



어렵게 합격한 직장인데...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슬아슬 했고

위태위태 했다.


하루하루 업무가 너무 버겁고 힘들어

새벽녘까지 울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육 진행 D-1,

머릿속에 강의 청사진을 그리다가

잠을 설치고 출근했다.


드디어 D-day.

출근하자마자 나는 교육을 해야 할 회의실로 올라가

직원들 자리마다 필기도구를 가지런하게 세팅해 두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교육 시작 전

입구에 다과를 준비해 놓는 루틴이 있었다.

나 역시 이렇게 따뜻한 물과 과자를 세팅하는데

한 선배님이 다가오셨다.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음... 네, 괜찮습니다.

자료들도 다 인쇄했고 화면도 잘 나오는지 확인했습니다."


"처음인데도 잘 준비했네요.

그럼 교육할 때, 남자 직원 한 명만 조심하면 될 거예요."


"네??"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선배는 잠깐 곤란해하며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을 하더니 작게 말했다.


"그분이... 뭔가 잘못된 거 같다 싶으면

소리도 잘 지르고 그래요. 술도 잘 드시고.

작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서... 무서워. 조심해요."



윽.

갑자기 입도할 때의 뱃멀미가 다시 올라올 것 같은 느낌.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이야.


'내가 연말정산에 대해 잘 모른다고,

교육 중간에 화내시면 어떡하지.'


갑자기 더 떨리기 시작한 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가

준비한 대본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불안하든 말든 상관없이 야속하게도

우리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간다.



오전 10시. 어느덧 시작 시간이 다 되었고

나는 얼른 선배님(직원)들이 자리한 강의실로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1월 1일 자로 새로 발령받은 신규직원 알입니다.

급여 등 재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보통 교육을 하면,

강사이력을 피피티에 띄워서 멋지게 자기소개를 하던데.


나는 내 소개로 '발령 인사'를 하고 있다. 하하.


정말 이게 맞는 건가? ㅠㅠㅠㅠ

입사한 지 20일밖에 안된 신입사원이

20년도 넘게 근무하신 어른들 앞에서 교육을 한다고?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현실로 돌아왔다.



"제가 사실은... 연말정산을 잘 모릅니다. (뜬금 고백)


그런데 이렇게 연말정산 교육을 맡게 되서허어...

(염소 목소리 조금씩 비치기 시작)

세무서 책으로 공부하고 인터넷 검색도 하며

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하아...(불안불안~하다)  


혹시 오늘 교육에서 부족한 점이 있으며어언...

얼마든지 말씀 주세요호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아아...흐아...

(염소 바이브레이션 폭발!!!!)"



.

.

.




© baileymahon, 출처 Unsplash

음메에~

(응답하라 1997 염소소리)



떨릴 때 나오는 염소 목소리로 덜덜덜 인사를 마쳤다. 

나 망한 건가


또다시 뱃멀미의 울렁거림이 느껴졌지만

여기서 토하면 진짜 내 인생 끝이라는 마음으로

올라오는 쓴 물을 삼키며,

긴장하지 않은 교육을 시작했다.



다행히 파르르 떨리고 있는 새끼염소 목소리에

선배님들 마음이 동하셨는지


중간중간 틀려도 여자 상사님들은

부처님 미소로 인자하게 웃어주셨다. 

마치 이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를 보는 것처럼.



그럼 이제 그 무섭다는 남자직원 표정을 확인할 차례.


나는 마이크로 말을 하며

곁눈질로 슬쩍 그분이 앉은 쪽을 보았는데...


'오??!!

 자고 있다, 자고 있어!!!! 유레카!!!'


술을 좋아하신다더니

어제 거하게 드셨는지 엎드려 주무시고 계셨다.

울렁거리던 발표멀미가 쑥~ 내려가는 기분.

차라리 교육을 듣는 것보다 주무시는 게 마음이 훨 편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우리 보고 떠들 거면 차라리 엎드려 자라고 소리치시

이유를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이 편해져

여유롭게 웃기도 하며 남은 교육을 진행하였고

결국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날, 며칠 만에 유튜브를 보며 맘 편하게 저녁을 먹었다.

책상 위 내 업무는 가득했지만

마음만큼은 잠시나마 가벼운 이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신입에게 다 기피하는 업무를 시키는지에 대해

회사를 많이 원망했었다.


가끔 TV를 보면 과다한 업무 스트레스로  

신입공무원이 안 좋은 선택을  별이 된 뉴스가 나오는데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 또한 몇 년간 힘들게 공부하여 들어간 직장을

내 손으로 그만 두기보다는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한

새벽 날이 무수히 많았으니깐.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힘든 업무로 시작했기에

몇 년 뒤 맡은 다른 일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긴 했다.


 더 많은 교육도 떨지 않고 잘 진행하게 되었으며

신입시절부터 열심히 해왔다는 인정도 받았다.




여기서 신규직원에게 드리는
실제 경험 직장 팁!

 


그러므로 혹시 위의 처럼 어려운 업무를 맡아 

힘이 든 직원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어요.


나중에는 분명 일이 익숙해져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한다고.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업무가 터무니없이 많이 부과되었거나

자신이 부당한 상황에 놓였을 때는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직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신규시절 그렇게 못해, 그 점이 참 아쉽거든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회계와 연말정산 세금 

눈 덮인 밤까지 혼자 계산할 때면

'힘들어 사라지고 싶단 생각'까지 했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회사들에게 한마디!


새끼염소이자 병아리인 신규직원에게

너무 어렵고 힘든 것 맡기지 말아 주세요.


신입에겐 매일이 배울 것 투성이인 전시 상황입니다.


조금만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고 기다려주세요.

누구나 다 초보 시절이 있잖아요.


저처럼 일하다 사물함 안에 들어가 울면서도

일해야 하는.

그런 힘든 신입들이 더 이상은 없었음 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울릉도 정보◇

✔️아까 위에 다과세팅을 이야기했었죠?

울릉에서 행사 시 가장 많이 준비하는 다과가 있어요. 바로 호박엿!


행사용품을 만드는 직원들

'울릉도 호박엿'은 기념품으로 사기에 가격도 비싸지 않고 맛도 달달하여 추천합니다. 

엿뿐만 아니라 '호박젤리', '호박조청', '호박초콜릿'도 팔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아버지 퇴직 전 사무실로 보내드린 호박엿 선물
임용고시에 합격한 이종사촌 학교로 보낸 호박엿 선물(동생 인스타)



이전 05화 울섬사계 (울릉도 섬에서도 사랑은 계속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