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침묵할 수 있는 가
머릿속에는 하루에도 수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걱정, 하지도 않은 대화의 시뮬레이션.
그 생각들은 쉼 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멈추는 법을 모른다.
왜일까?
왜 우리는 늘 생각에 휘둘리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생각이 곧 ‘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슬픈 생각이 들면 ‘내가 슬프다’라고 느끼고,
두려운 생각이 들면 ‘나는 지금 위험하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생각은 ‘나’가 아니다.
생각은 마음이라는 시스템에서 자동적으로 생성된 신호에 불과하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이유는 바로 생존을 위해서이다. 즉 대부분의 생각들은 우리들의 생존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도 좋다. 뜨거운 것이 닿으면 반사적으로 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생존을 위한 자동적 반사반응이 마음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생존과 안전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 낸다. 외부 환경을 해석하고 미래를 대비하려는 과정 자체가 마음의 자동적 반응으로 이는 본능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기억, 경험, 타인의 말, 사회적 조건, 감정 반응 등을 ‘무의식’ 속에 저장해 왔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계속해서 생각을 생산해 낸다. 마치 라디오가 자동으로 방송을 내보내듯, 생각도 조건만 충족되면 떠오른다. 즉 생각은 내가 ‘의도해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은 과거의 저장된 정보가 재생되는 자동 반응이다. 내가 한 번도 의식적으로 선택한 적 없는, 낡은 기억의 편집본일 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기억이 있으면, 비슷한 상황만 나타나도 ‘나는 또 거절당할 거야’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단지 예전 경험의 복사본일 뿐이지,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이거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나',
'지켜보는 나’가 '진짜 나'이다.
마음을 침묵하는 첫걸음은
바로 이걸 아는 데서 시작된다.
“아, 지금 이 생각은 자동으로 올라온 거구나.
내가 의도해서 떠올린 게 아니구나.
그냥 마음이 자동프로그램으로 올려 보내는 거구나."
그렇게 한 걸음만 물러나면 생각은 더 이상 ‘나’가 아닌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침묵이란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다. 생각이 떠오르되, 그것을 믿지 않고 반응하지 않고 그저 두는 상태. 비가 오면 우산을 쓰듯, 생각이 오면 그냥 바라본다.
붙잡지 않고,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지나간다.
명상은 이 훈련을 돕는다.
하지만 꼭 복잡한 명상이 아니어도 된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보는 것 그 단 한 번이어도 좋다.
그게 바로 침묵의 문이다. 또 다른 방법은‘지금-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손끝에 닿는 감각, 앉아 있는 의자의 느낌, 발가락의 움직임, 주변에서 들려오는 작고 잔잔한 소리. 전엔 듣지 못했던 존재감 없었던 소음마저도 듣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다준다.
그리고 ‘지금’ 안에는 과거의 기억도, 미래의 걱정도 없다.
거기엔 침묵만 있다.
생각은 떠오를 것이다. 그건 마음의 본능이니까.
우리는 이를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이를 그저 유유히 지켜볼 수는 있다.
그 안에서 우린 진정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에 동조되지 않고, 생각이 나가 아니다는 걸 알게 될 때
드디어 침묵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더 이상 그 생각이 아니다.
나는 그 생각을 바라보는 자, 그 너머에 있는 의식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마음은 말없이 가장 깊은 말을 해준다.
소란한 머릿속에서도 침묵은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진짜 나의 목소리가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