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가 원하는 것과 영혼이 원하는 것의 차이는
에고는 두려움이 바탕이 된 욕구이며
영혼은 사랑이 바탕이 된 욕구
즉, 가슴설렘으로 말해주는 끌림에 따름이다.
에고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욕구이며
그것은 잠깐의 희열과 다시금 채울 수 없는 공허함으로 머문다.
영혼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이며
그것이 남기는 것은 평온함과 충만한 만족감이다.
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이 일이 진짜 내 일인가?', '왜 이렇게 공허하지?', '정말 이걸 하려고 태어난 게 맞을까?'. 소명을 찾는다는 건 어쩐지 거창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그건 아주 작고 단순한 데서 시작된다.
어떤 일을 할 때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면,
딱히 큰 성과가 없어도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힌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끌림이 어디에서 오는가이다.
에고는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뒤처질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구로 움직인다. 그래서 원하는 걸 손에 넣어도 잠깐의 희열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허전하다. 다 채운 줄 알았는데, 금세 다시 비워진다. 그게 에고의 방식이다. 반면 영혼이 원하는 건 다르다. 사랑이 바탕이 된 끌림이다.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하고 싶은 마음. 결핍을 채우기보다는, 내 안에서 넘치는 것을 나누고 싶어지는 상태. 그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은 짧은 쾌감이 아니라 평온한 만족감이다.
그냥 좋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이 먼저 알아챈다.
그래서 소명은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게 아주 사소해도 상관없다. 글을 쓰는 것, 향기를 고르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꾸 하고 싶은 것. 소명은 대개 세 가지가 겹치는 지점에 있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하지만 처음부터 그걸 다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런 생각에 멈춰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게 돈이 되겠어?”, “이걸로 어떻게 먹고살아?” 이런 생각은 대부분 두려움에서 나온 에고의 목소리다.
하지만 소명은 처음부터 돈이 되는 게 아니다.
그건 일단 ‘살아있다고 느끼는 일’이어야 한다.
내가 진짜 나로 존재하는 느낌, 그게 먼저다.
그 후에야 모든 것이 따라온다. 소명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해온 일 중 진짜 좋아했던 걸 떠올려보자. 누군가가 내게 고맙다고 했던 순간도 떠올려보자. 내가 별 노력 없이도 잘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도. 그리고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지점을 적어본다. 아주 작게라도 시작해 보자. 그게 취미든, 프로젝트든, 혹은 그 누구도 이를 삶의 중심이 되는 일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단순한 반복이어도 괜찮다. 작은 걸 진심으로 해내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건 나의 길이 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고 싶었던 역할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건 딱 한 가지 정답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도로 주어진 것이다.
그 지도를 여는 방법은
내가 가장 나답게 빛났던 순간들을 따라가는 것.
그렇게 작은 끌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아... 이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구나... 이걸 위해 내가 여기에 온 거였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