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펴주지 못한 작은 나들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심오한 질문을,
나는 불과 3년 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 물음은 오래도록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답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몸이 내가 아님은 분명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갈망했다.
나의 본질, 나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그 물음은 삶의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이자,
동시에 너무도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오랜 방황 끝에 점차 흐릿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잃은 채 살아왔고, 이제 다시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라.
나는 그 질문 뒤에 남아있는 여운 속에서 진짜 나를 찾았다.
심장 깊은 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던 투명한 기운이, 천천히 내 몸 밖으로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말로 닿지 않는 그 기운 속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온몸을 지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고, 나는 그 안에서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던 ‘나’를 느꼈다. 가장 안쪽, 가장 조용한 곳에서 진짜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알아채지 못했을 뿐, 그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였다.
지켜보는 자로,
이 지켜보는 자, 이 지켜보는 자가 나의 실체였다.
나의 진아이며, 참나였다. 그렇다면 이 생에 이 이름과 몸을 가진 나는 누구인가? 이 또한 나이다. 기억을 잊은 영혼이 이 이름으로 불리는 나를 자신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 둘의 나, 지켜보는 자와 이름을 가진 나는 분리될 수 없는 유착관계로 생을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육안으로 둘러싼 피부를 기준으로 안과 밖을 나누고 이 안의 몸을 '나'라고 칭하며 온갖 감정과 생각도 나와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간혹, 지켜보는 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우리는 이를 그저 신기한 일쯤으로 넘긴다.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켜보는 자가 생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깨어난 의식으로써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영혼의 삶,
즉 나의 삶이다.
| 지켜보는 자가 진짜 나임을
우리는 지켜보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모든 것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지켜보는 자의 삶이며, 깨어남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흘러가지 못한 감정들은 고요한 어둠 속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을 바라보고, 품고, 풀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 생의 주된 목적이 되어도 좋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본질을 알지 못했기에(감정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에) 무섭고 두려운 감정들을 외면해 왔고, 그렇게 방치된 감정들로 결국 내 마음 속 흐름의 통로를 막아버리게 되었다.
감정이 흐르지 못하면 물이 고여 섞는 것처럼 마음과 몸에 이상을 일으킨다. 감정은 잠재된 채로 머물 수 없기에 현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거나, 반사되거나,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감정이 풀려날 때까지 비슷한 상황들은 반복된다. 고로, 삶은 제 길을 나아가지 못한다. 또한 이 생에서 풀어주지 못한 감정은 흘러가지 못해 갇힌 채로 대물림된다. 나는 내 억눌린 감정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기를 원치 않는 다. 또한 이 감정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싶다. 그래서 내 안에 갇힌 수많은 감정의 인격체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은 이 삶을 체험하려는 본질적인 이유이자, 순수한 나를 만나는 길이며, 진정 원하는 현실을 창조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억눌린 감정들은 내가 되어 나인 척 살아간다
감정은 살아있는 에너지체이다.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흐를 때 정체되지 않고, 느껴지고, 표현되고, 해소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 감정을 '나쁘다', '수치스럽다', '두렵다'라고 판단하고, 그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차단하면, 그 감정 에너지는 흐르지 못하고 멈춘다. 감정은 본래 중립이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순간부터 그 감정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덧붙여지고 그 해석은 반복될수록 더 뚜렷한 패턴을 만들며 결국 하나의 성격, 하나의 고유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작은 나'가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멈춰 선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깊은 곳에 덩어리처럼 저장되며(갇히며), 우리가 반복적으로 느끼기를 거부하면 할수록 그 에너지는 더 단단하게 패턴화 되고 고정된 생각(믿음)+감정의 조합으로 하나의 고유한 성질을 띄게 된다. 이것이 곧 성질을 갖는 다, 인격화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침내, 고유한 말투와 고유한 반응을 가지며 나를 대신해 삶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마치 어린 시절 상처받은 아이가 그 감정 안에 갇힌 채 자라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감정으로 계속 반응하는 것처럼, 그 감정은 멈춘 시간이자, 그 안에 갇힌 내가 된다.
그렇게 내 안에는 화를 두려워하는 나, 버림받을까 봐 조급해하는 나, 사랑받기 위해 무조건 참는 나, 슬픔에 빠진 나, 늘 불안한 나,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걸 무서워하는 나들이 생겨난다. 두려움에서 파생된 이 감정들은 오랫동안 억눌린 끝에 하나의 인격체처럼 내 안에 자리를 잡은 모습들이다.
처음엔 단순한 감정이었지만 반복적인 억압과 외면, 이해받지 못함으로 점점 더 강한 에너지를 띄게 되고 마침내 나를 대신해 삶에 반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투를 따르고, 그들의 감정으로 선택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감정들이 나인 줄 알고, 그 감정들이 느끼는 고통을 나의 것이라 믿으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삶의 주도권은 내가 아닌 '나인 척하는 나'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해 느껴지지 못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들은 단지 자유를 원할 뿐이다. 그들은 살아있으며 에너지이므로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의 삶에 그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비슷한 상황을 불러온다. 그 감정을 느껴줄 때까지 반복해서.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은 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감정들이 내 안에 갇혀 있는 한, 즉 내가 이 감정들을 느껴주지 않고 거부하는 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반복될 것이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현실은 눈앞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감정은 영혼의 언어이다.
감정은 나쁘지 않다. 감정은 삶에 있어서 우리가 자신을 알아가는 가장 진실한 통로이며,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언어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우리가 본질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알려주는 고마운 신호이며, 삶의 길잡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억눌린 감정의 인격체들은 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오랫동안 느껴지지 못한 채, 나의 인식 너머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아로 자라난 존재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그 감정들 또한 다만 사랑을 원한다.
내가 그들을 바라봐주고, 설명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며, 조용히 느껴주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나인 척하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감정이 흘러가기 시작하면, 나 역시 다시 나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다.
|억눌린 감정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무 일 없는 평온한 날에 불안이 밀려오고, 별것 아닌 말에 눈물이 터지며, 누군가의 한 마디에 깊은 분노가 솟구친다면 그건 지금의 일이 아니라, 오래전 억눌려 있던 감정이 고개를 든 신호다.
억눌린 감정은 작은 자극에도 폭발한다. 반복되는 감정 반응, 계속되는 상황, 이유 없는 무기력과 냉소. 그 속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 마음속에 낡은 상처처럼, 잊은 줄 알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감정들이 또 다른 내가 되어 나를 조종하고,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끌어당긴다. 그 감정은 사실 오랫동안 내가 느끼지 않기로 한 것이며, 외면한 채 덮어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더 깊은 곳에서 살아남아 있다. 억눌린 감정은 슬픔 속에서 신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그 손은 바로, 나의 따뜻한 인정과 다정한 품이다. 내가 다시 바라봐주기를, 나의 눈으로 만나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억눌린 감정들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
감정은 느껴줄 때 비로소 흐른다. 억눌린 감정에게 말하라. "괜찮아. 네가 있다는 걸 알아. 네가 나였다는 걸 알아." 그 감정을 향해 따뜻한 숨을 불어넣듯이, 조용히 앉아 그 감정과 함께 있어라. 말없이 바라보라. 판단 없이 들어주라. 그 감정은 언젠가 내가 외면했던 나의 일부분이다.
울어도 좋다. 소리 내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가슴이 반응하는 그 순간, 감정은 이미 자유를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흘러가도록 허락하면 된다. 억눌린 감정으로 만들어진 자아는 결국, 사랑을 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어떤 해결도 필요치 않다. 그 감정을 고치려 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그저 사랑으로 바라보아라.
사랑으로 바라보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감는 덩어리가 아니다. 그들은 나의 품 안에서 잠잠해지고, 고요히 사라진다. 우리는 삶을 통해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통해 사랑을 배운다. 그것이 그들이 처음부터 원해온 전부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깊은 해답이다.
|감정을 품을 때, 우리는 진짜 나로 돌아간다
감정은 결코 나를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나에게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온 길잡이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 자신을 기억하고, 감정을 통해 사랑을 배운다. 그리고 감정을 통해 다시 본질로 돌아간다. 감정은 언제나 조용히 알려준다. 지금 이 길이 내 영혼의 길인지, 아니면 조금 멀어진 자리인지. 하지만 우리는 그 역할을 알지 못한 채, 잘못된 길이라고 알려주는 감정들을 나쁘다고 여기고 무서워 외면해 버렸다. 그렇게 닫힌 감정은 흐르지 못하고 갇혀, 언젠가 말 걸지 못한 말처럼 내 안에서 멈추었고, 그 멈춘 자리마다 의식을 가진 작은 자아들이 되어 나인 척 살아가기 시작했다.
감정은 그저 흘러가야 할 에너지였고, 내가 길을 잃었을 때 손 내밀어주던 조용한 안내자였을 뿐이었다.
이제 나는 내 안에 갇힌 수많은 작은 나들을 풀어주려 한다. 나를 통해 흘러가야 할 에너지, 이제 그들을 해방시켜주어야 한다. 바라보고, 들어주고, 품고, 흘려보내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도 그들로부터 해방되리.
△
나는 안다.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상황들을 지켜보는 자가 진짜 나라는 것을.
나는 무한한 마음이며, 사랑이며,
이 생에서 나를 표현하기 위해 온 영혼이라는 것을.
이제는 지켜보는 자로서,
모든 감정을 사랑으로 흐르게 하나니
그리하여 내 안에 갇힌 수많은 나들이 자유를 얻고,
나 또한 더 깊은 평화 속으로 나아가리.
그대여, 기억하라.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사랑이며,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수 없다.
내 안에서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마주하라.
판단 없이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하라.
생각도, 감정도 내가 아니니
나는 그것들을 지켜보는 자이다.
되고자 하는 나를 향한 건설적인 생각을 선택하고,
감정을 통해 삶을 배워가며
결국
내가 완전한 사랑
그 자체였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