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역할은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 육체가 나일까, 이 생각이 나일까,
아니면 매번 반복되는 감정과 반응, 그 패턴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나일까.
‘나’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설계된 것이라면_
나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우리 모두는 아바타이다.
우리 모두는 아바타이다.
이 말은 더 이상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어왔던 이 인격, 성격, 말투, 반응, 감정의 흐름들까지 사실은 모두 하나의 설계된 패턴이다. 마치 게임 캐릭터가 생성될 때 주어지는 캐릭터 시트처럼,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기본값들을 가지고 왔다. 전생의 기억, 유전적인 기질, 이번 생에서의 환경과 초기 양육 패턴, 문화적 코드와 사회적 영향력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하나의 운영시스템이 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인격’이다. 우리는 특정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어떤 감정이 자동으로 솟아오르고, 우리는 그것에 붙잡힌 채 살아간다. 알고 있으면서도, ‘또 반복하게 되는’ 말과 행동들. ‘나답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버리는’ 선택들. 이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깊숙이 각인된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이미 정해진 트랙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화가 났을 때, 침묵하거나 폭발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 그것조차 ‘우리라는 아바타’가 선택하는 특정한 코드의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아바타를 작동시키고 있는
진짜 ‘나는 누구인가?’
누가 이 캐릭터를 조종하고 있는가?
|누가 이 캐릭터를 조종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모든 것을 뒤흔든다.
바로 ‘신’이다.
신은 우리라는 존재를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우리가 분노할 때, 신이 분노를 체험하고 있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신이 사랑을 체험하고 있으며, 우리가 침묵하고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신은 우리라는 필터를 통과해 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통로다. 존재의 근원이 이 세계를 체험하기 위한 관문이자 창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자이며, 그 지켜보는 자를 통해 신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자아는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지켜보는 나’이다.
이 지켜보는 나가 깨어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들어선다. 더 이상 과거의 패턴에 의해 끌려가지 않고, 더 이상 자동 반응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이건 내가 한 반응이 아니라, 그저 일어난 반응이다’라는 자각이 생기고, 바로 그때부터 프로그램은 깨지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은 자각이 닿는 지점에서 해체된다. ‘내가 이 반응을 관찰하고 있다’는 인식이 시작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바타가 아닌, 창조하는 신의 파동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운명을 바꾸기 시작한다. 우리가 운명이라 불러온 모든 흐름들 사주명리, 천성, 타고난 기질, 유전자적 성향의 모든 것은 캐릭터의 기본 틀일 뿐이다. 그 위에 무엇을 새겨 넣을 것인지는, ‘지켜보는 나’의 몫이다. 운명은 기획안이지, 완성본이 아니다. 시나리오의 대강은 정해져 있지만, 디렉팅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 디렉팅을 바꾸는 힘은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건 내가 만든 흐름이다'라는 자각,
'지금의 내가 이 반응을 선택하고 있다'는 인식,
그때부터 우리라는 캐릭터는 자동조종 상태에서 벗어나, 신의 파동을 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
|우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로그램을 초월한 신이다.
우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로그램을 움직이는 신이기도 하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물 안에서 나뉘어진 경험 방식일 뿐이다. 신은 자신을 체험하고자 우리라는 아바타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 아바타 안에 잠시 들어와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바타가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바타가 자신이 아바타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움직이는 근원의 에너지를 알아차릴 때, 그 존재는 더 이상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무대 위의 창조자가 된다.
그래서 삶은 그때부터 ‘즉흥’이 된다. 자동이 아니라 창조이고, 반복이 아니라 자각이며, 고정이 아니라 확장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름을 가진 아바타다. 그 이름은 하나의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은 역할을 정한다. 하지만 이름이 곧 본질은 아니다. 이름은 그냥 통로다. 진짜 본질은 이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의식, 바로 그 신이다. 우리는 종종 이 이름에 집착하고, 이 이름에 인생의 무게를 실으며 살아가지만, 모든 이름은 결국 신이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우리’라는 이름도, 그저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신의 얼굴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무엇인가? 선택이란 것은 진정한 자유의지일까, 아니면 그조차도 프로그램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식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캐릭터와 신성을 동시에 품은 존재가 바로 '나'이다.
반응하는 아바타의 위치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굴러간다.
하지만 지켜보는 자의 자리에서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선택은 어떤 것을 하느냐보다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감정이 올라와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깨어 있다면, 우리는 다른 파동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캐릭터와 신성을 동시에 품은 존재다. 캐릭터는 ‘정해진 흐름’을 따라가지만, 신성은 ‘그 흐름을 바라보고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 그 둘이 만나는 순간, 삶은 의식의 연주가 되고, 우리는 진정한 작곡가가 된다. 우리는 이미 설계된 캐릭터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캐릭터의 반응을 바라보고 다시 쓸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기억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은 ‘우리’라는 존재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숨 쉬고, 느끼고, 움직이며 이 세상을 체험하고 있다. 그 체험을 더 이상 자동 프로그램의 반복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즉흥으로 새롭게 열어갈 것인지는 오직 지켜보는 자의 자각에 달려 있다.
우리는 아바타다.
하지만 그 아바타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신이다.
그리고 그 신은,
이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그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신은 단지 의식을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순수한 진동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라는 존재를 통해 세상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자각은 단지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켜보는 나로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사랑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바타의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그 역할 안에 깃든 사랑을 기억하게 될 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자각이다. 이 존재가 나라는 것도, 아바타라는 것도, 신이라는 것도 결국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살아내는 건 사랑뿐이다. 우리는 사랑을 떠올리기 위해 태어났고, 그 사랑을 잊어야 했기에, 아바타라는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사랑은,
다시 나를 이 삶으로 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