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도망인가, 귀환인가?
by 바샤르
이 메시지는 단순한 쾌락이나 순간의 욕망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곧, 자아의 소음을 넘어 영혼의 울림에 귀 기울이라는 초대이다.
진정한 흥미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는 존재의 본질적 방향이며, 내면의 진실과 일치하는 흐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그 감응이 깨어난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오직 나의 내적 진동과의 공명 속에서만 인식된다. 이때 흥미는 단순한 기호나 기분이 아닌, 존재 그 자체가 움직이고자 하는 내적인 충동이며, 삶이 나를 통해 표현되고자 하는 자율적인 에너지의 징후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단지 ‘좋아하는 것을 하라’는 충고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진실한 나와 가장 깊이 연결되는 선택을 하라’는 영혼의 지시이자, 깨어있는 삶으로 진입하는 통로다. 그러므로 그것은 에고의 흥미와 영혼의 흥미를 구별할 수 있는 섬세한 자각 위에서만 비로소 진실로 작동한다.
에고는 종종 흥분을 통해 불안을 마비시키고, 공허함을 덮기 위해 쾌락이나 성취로 도망친다. 하지만 그 ‘달뜸’은 진짜 나를 향한 끌림이 아니라,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도피의 욕망일 뿐이다. 에고는 이런 흥분을 ‘흥미’로 착각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화려하게.” 그 말속에는 불안을 자극하고 결핍을 조종하려는 에고의 의도가 숨어 있다. 그래서 결국, 그 에고의 흥미는 ‘지금 여기의 나’를 회피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그 도망을 정당화하는 외피가 된다.
반면,
영혼이 느끼는 흥미는 ‘떨림’과 같다. 마치 내가 잊고 있던 진동이 문득 되살아나는 것과 같이 설명할 순 없지만 내 안의 어떤 고요한 부분이 ‘이것이 나다 ‘라고 속삭이는 설렘이다. 아직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유 없이 끌리고, 익숙하지 않은데도 마음은 고요하고 깊어진다. 그건 무언가를 ‘성취’ 하기 위한 흥미가 아니라, 무엇을 통해 나를 ‘회복’하는지에 대한 이끌림이다. 그저 살아 있다는 느낌, 이는 존재 회복의 열망 즉 나를 향한 부름이자 떨림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흥미를 무엇으로부터 느끼는가?”
“이건 나를 더 깊이 나로 살아가게 하는 흥미인가,
아니면 지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흥미인가?”
이 질문 안에서, 우리는 에고의 조종과 영혼의 인도를 구별할 수 있는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끌림은 진실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대가 영혼의 방향에서 흥미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곧 자유의 길이며, 그대 안에 이미 준비된 ‘최고 현실’로의 진입이 된다. 그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진입은 바로 지금의 진동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