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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단 Oct 04. 2023

입원 시작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중환자실에서 병실로 옮겨졌다. 엄마는 우리더러 집에 가서 간단한 짐들을 챙겨 오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엄마가 육 개월이 넘는 시간을 그 병원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어렸을 적, 엄마와 아빠는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중학교쯤 되어서야 '커플이 더 나아가면 부부가 되는구나!'를 알았다. 그 정도로 서로를 향한 애정은 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는 간간히 이혼이야기도 나왔다. 어릴 적 나의 꿈은 엄마아빠의 이혼이었고, 막내인 내가 성인이 되던 날엔 '이제 다 키웠으니 맘 편히 갈라서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애정이 있었지만, 단체로 묶어서 보았 때에는 불협화음이 따로 없었다.

아빠는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 가정에는 충실하지 않았다는 말이며, 가정의 상당한 부분을 엄마가 혼자 책임졌다는 말이다. 아빠는 가끔 폭력도 휘둘렀다. 엄마겐 심하게, 언니에겐 조금 덜 심하게. 하지만 나는 제외였다. 아빠는 나까지 건드리면 이 집에서 자신의 편은 없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가 아빠의 병시중을 들어야한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빠와 유일하게 사이가 좋았던 내가 간병하리라 다짐했다. 나만 이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엄마가 왜 간병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빠가 엄마한테 잘해준 적이라도 있냐고! 아니, 엄마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나 했다고!

하지만 엄마는 안된다며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절대, 절대, 절대, 아빠가 두 딸의 앞길을 막는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자신의 선에서 자신의 남편과 관련된 모든 걸 다 끝내겠다는 태도였다.


엄마는 종합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119가 데려갔던 병원은 엄마의 직장인 그 병원이었다.어쩜, 당연히 엄마의 일이었다는 듯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엄마는 입원실의 좁은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고, 아침엔 밑으로 내려가 일을 했다. 점심시간이면 올라와서 아빠 밥을 챙기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 오후업무를 했다. 그리곤 또 위로... 그렇게 엄마는 아빠의 간병을 이어나갔다. 나에게 힘들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아빠의 몸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재활을 시켰다. 엄마는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나섰다.


아빠가 쓰러졌으니, 가장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넘어갔다. 엄마에게 퇴근과 출근이 없는 삶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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