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일상을 사는 방법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날, 엄마가 양파를 챙겨줬다. 할머니가 직접 키워서 보내주신 것이라며, 한아름 내 손에 들려 보냈다. 혼자 자취하는 딸에게 이 정도 양의 양파는 과하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나도 몇 개는 썩어 없어지겠거니, 하다가도 이내 묵묵히 받아 들었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받은 것이리라.
고마운 마음 하고는 별개로, 양파를 손질하는 것은 차일피일 미루었다. 양파의 알싸함에 눈이 매워지는 것이 싫었으니까. 빨리 손질하지 않은 양파는 연두색 싹이 나고 물컹하게 짓무르다가 썩어버린 다는 걸 안다. 이미 여러 개의 양파가 그렇게 내 손을 거쳐 쓰레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양파를 베란다에 처박아 두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나면 억울하잖아.’라는 이상한 핑계를 대며 말이다.
반대로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아 답답한 날도 있었다. 수차례의 심리 상담에서 억압했던 기억을 끄집어 올릴 때면 나는 상담사 앞에서 펑펑 울고 싶어 진다. 그러나 슬픈 감정은 턱끝을 지나지 못하고 이내 수그러들어 멍하게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눈물에 핑계가 필요한 날들이 있다.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라는 질문이 고맙기도 하지만 성가시기도 하여서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냥, 슬픈 영화를 봐서.’라는 대답이 ‘사랑하는 고양이가 어제 죽었어’보다 상대방을 덜 곤혹스럽게 한다. 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싶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어 버렸고, 눈물은 올라오다가도 점잖을 떨며 마음에 웅크려버린다. 깊은 사랑이 끝난 날 슬픈 영화를 보듯이, 나는 양파를 썰었다. 조금 울었다. 양파가 매워서. 그냥, 양파가 매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