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일상을 사는 방법
밖에는 비가 온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라 식물들에게는 반갑겠지만은, 저혈압인 나는 축 처진다. 생활비는 이미 다 쓴 지 오래다. 백육십 가량 들어오는 돈에서 월세, 관리비, 교통비, 병원비를 내고 나면 남는 건 없다. 비는 오고 돈은 없고. 낭만은 있는데 쓸 데는 없고. 씨발스러운 날이다.
씨발, 씨발, 씨발…
중얼거리며 베란다를 걸었다. 베란다에는 이미 자란 식물과 상자에 넣어둔 씨앗이 있다. 씨앗들에게는 오늘이 씨발스럽지 않겠지.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니 마냥 행복하겠지. 그렇다면 씨를 발아시켜야겠다. 어린 이는 태어나지 않고, 태어난 이는 자살하여 자연소멸하고 있는 이곳에 나만 있을 수는 없다.
생은 고통이다. 부처가 그랬고, 쇼펜하우어가 그랬고, 내가 그랬다. 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씨발스러운 날, 씨 발아를 해보자.
내가 가진 것은 비자나무 씨앗 하나, 레몬 씨앗 네 개다. 모두 제주도에서 온 씨앗들이다. 하나는 구좌읍의 비자림에서, 네 개는 서귀포에 있는 어느 할아버지가 따주신 레몬에서 나왔다.
먼저, 손톱으로 씨앗의 껍질을 벗겨 내었다. 외피와 내피를 모두 벗겨내면 연둣빛 속이 나온다. 다음으로, 키친타월을 물에 적셔 씨앗을 올리고 지퍼백에 넣었다. 습하고 축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따뜻하고 어두운 곳에 두면 일주일에서 이주일 내에 싹이 올라올 것이다.
여기에는 씨앗들이 기대한 제주의 자연이 없다. 대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있는 척박한 이곳에 내던져진 (Geworfenheit) 존재가 살아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