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에게
H에게
벌써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네요. 결코 지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까지도 시간은 꾸준하게 지나쳐 보내고야 만다는 사실을 오늘도 다시 한번 느껴요. 그렇게 웅크려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린 게 11년, 내가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꼭 2년이 되었네요. 그전에는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제 와 이렇게나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질 줄은 나도 몰랐어요. 당신이 내게 한 말만큼은 살아온 30년 내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어서, 결국 이런 마음마저도 당신은 이렇게 되어버릴 줄 알았나 봐요.
처음엔 다 포기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없었던 생이니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자 했어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게 없다고 했었죠. 그때 제가 딱 그랬어요. 다시 시작하면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요. 그렇게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귀의하는 삶을 살았으면 했어요. 어차피 누군가의 생으로 이어진 목숨이니, 나의 이 목숨까지도 타인을 위해 쓰이길 바랄 뿐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내 삶에 왜 이렇게 따뜻한 것들이 많을까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그들이 해주는 따뜻한 말들, 날 믿고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만들어요. 내게 조금만 더 돈이 있다면, 조금만 더 능력과 권한이 주어진다면 나는 조금 더 많은 이들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따뜻하게 덥히는 이들을 더 든든한 온기로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어려울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시도하고 도전해요. 나를 태워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자꾸만 시작해요. 가끔은 내가 타인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내 사리사욕을 위하고 있는 건 아닐지 돌아보게 되어요. 이 모든 시도는 나의 교만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내게 주어지는 자리와 권한들에 취해있지 않은가.
마치 오늘을 예견한 것처럼 당신은 내게 말했었죠.
‘네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알게 될 거다. 그때 넌 뭐라고 말할 건지 지금부터 잘 생각해 둬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어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그래서 겁이 나요. 누군가 나에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까봐, 난 답을 알지 못하는데. 답하지 못하는 나는 어쩌면 더는 올라서는 안 될 곳을 넘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이카로스 설화가 꼭 나의 이야기 같지요. 처음엔 그저 탈출을 위해 날았지만, 자유에 취해 경고를 무시하고 더 높은 곳을 탐하게 되어버린 이카로스. 그리고 뜨거운 태양 빛에 날개가 녹아 그대로 바닷속으로 추락하고야 만 이카로스. 지금 나의 날개짓이 이카로스와 무엇이 다른 걸까요. 나는 조금 더 높이 오르고 싶은데, 이래도 되는지 혼란이 커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 이전에 끊임없이 내가 다짐하는 것은, 이 모든 시작은 내가 아니라 타인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마음이라는 거에요. 내가 어디까지 욕심을 내건, 그렇게 어디까지 오르게 되던. 끝끝내 질문을 받고 추락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도 내게 생을 선물한 누군가를 위해, 나 역시도 타인을 향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이런 길을 걷고자 하는 딸이라 미안해요, 아빠. 가시밭길 길을 가겠다해도 말없이 믿어주고 지원해줘서 감사해요.